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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국보 승격에 문제없다- 장병수(밀양문화관광연구소장)

  • 기사입력 : 2017-07-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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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란 인류 역사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다. 문화재를 통해 과거 조상들의 삶과 지혜를 배우며, 그로부터 미래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경남의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서도 영남루가 가지는 역사성과 건축적 가치성은 평가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영남루가 국보 승격으로 가지는 문화재적 가치 또한 분명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긍심과 정신적 가치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필자는 3가지 측면에서 영남루의 국보 승격은 당연하다고 본다. 영남루를 먼저 역사성에서 살펴보면 신라시대 때 영남사라는 절의 부속건물인 누각을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옛 건물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신축하여 영남루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옛 밀양읍성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조선후기 대표적인 목조건물로서 우리나라의 3대 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1174년 임춘(林椿)이 지은 ‘영남사죽루(嶺南寺竹樓)’라는 시문에 처음 나타나 촉석루(고려 공민왕 14년, 1365)와 숭례문(태조 7년, 1398)보다 훨씬 앞선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위의 목조 건축물과 비교하면 다 같이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등 국가의 외란을 거치며 전소되고 중건과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숭례문은 2008년 화재로 88% 이상 소실되었으며, 촉석루는 1950년 9월 6·25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소실된 아픔이 있다. 하지만 영남루는 1843년(현종 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바로 중건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어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남루는 본루(本樓)를 기점으로 좌측에는 능파각(凌波閣)을, 우측에는 침류각(枕流閣)을 거느리고 있고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에는 월자형(月字形)의 층층각 (層層閣)이라는 계단형 통로를 연결하여,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누각 가운데 영남루만큼 건축적으로 완결되고 건축미가 뛰어난 누각은 없다.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독특한 특징을 가진 대형 누각 건축의 대미(大尾)이다.

    마지막으로 선인들의 삶과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은 예술, 문학을 망라한 인문학적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남루는 자연미와 조형미가 빼어나 고려시대 이후 이곳에서 쉬어간 시인과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시문이 남아 있는 자료를 보더라도 시(詩) 339인, 문(文) 21인, 아랑전설 5인 등 총 365인에 이른다. 영남루는 단순 건축물이 아니라 선인들의 정신이 깃든 문화와 예술의 산실이다. 인문학적 가치로 보아 국보 승격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중에서 특히 1844년 이 건물을 중수할 당시 이인재(李寅在) 부사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인 증석(11세), 현석(7세) 형제가 쓴 ‘영남 제일루(嶺南 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현판은 관광객들과 서예가들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현재 영남루는 보물 창고나 다름없다. 또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경 전국 16경(景)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남루는 광복 후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보 제24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12월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보에서 보물 제147호로 다시 지정되어 14년간만 국보의 지위를 유지한 아픔을 갖고 있다.

    현재 밀양시에서는 국보 재승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얼마 전 문화재청이 영남루를 국보 승격 최종 후보로 선정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문화재청은 영남루 국보 승격이 영남제일루의 문화재적 가치 회복이고 선현들의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가치 복원임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장병수 (밀양문화관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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