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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 가야(伽倻)는 어떤 나라였을까

잊혀진 왕국 가야 ‘비밀의 문’ 연다
고구려·백제·신라와 동시대 왕국
500여년간 독창적인 문화 꽃피워

  • 기사입력 : 2017-07-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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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점호의 ‘가야역사를 찾아서’는 7월부터 매주 화요일 총 20회 계획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경남·북을 비롯한 옛 가야땅에는 가야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산재하고 아직도 우리의 생활 속에 가야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는 그저 설화나 전설의 ‘잊혀진 왕국’으로 기억되며 좀처럼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히 문화재청이 지난 2015년 경남 김해와 함안, 경북 고령의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하고 등재 신청을 준비하는 등 곳곳에서 가야사 연구 및 복원사업이 활발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가야역사를 찾아서’는 짙은 역사의 안갯속에 묻혀 있는 가야의 실체를 전문기자의 현장취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에게 생생하게 전해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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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 고분군 입구에 설치된 가야전사들의 조형물. 갑옷, 투구, 말갑옷 등에서 가야가 철(鐵)의 왕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현장마다 옛 가야인의 체취

    잊혀진 왕국 가야(伽倻), 가야는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를 담당하면서 독창적으로 성장한 왕국이다. 가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서부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 기록에 그 존재와 실체가 나타난다.

    그리고 수많은 유적의 발굴로 가야가 3국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일본, 중국 등과도 활발한 대외교류를 했음이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가야는 3국의 역사에 가려진 채 신비로운, 때로는 잊혀진 왕국으로 묻혀버렸다. 6가야의 맏형인 가락국(駕洛國)의 왕도(王都) 김해에서조차도 가락국의 번성을 짐작하기란 여의치 않다. 수로왕릉(首露王陵)과 수로왕후릉(首露王后陵), 그리고 수로왕의 탄생설화가 있는 구지봉(龜旨峰) 정도가 그나마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이러한 유적마저도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관계로 고도(古都)로서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다.

    또 함안(咸安)의 아라가야(阿羅伽倻), 고성(固城)의 소가야(小伽倻), 경북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 상주(尙州)의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주(星州)의 성산가야(星山伽倻) 등 5가야도 고분(古墳)과 토기 등 유물에 의해 겨우 왕도로 짐작만 할 뿐 짙은 역사의 안갯속에 묻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김해지역에 가락국을 건국한 데 이어 경남·북 지역에 차례로 5가야가 건국, 서기 562년 대가야가 6가야 중 마지막으로 신라에 나라를 내주기까지 520년간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운 왕국이다.

    옛 가야땅 곳곳에는 가야인들이 남긴 유적 유물이 널려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는 아직도 가야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가야는 그저 설화나 전설로 살아 숨쉬는 신비의 나라로 불리며 좀처럼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유적들은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가야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흥미롭기 그지없다.

    독립된 왕국으로서 그 실체가 엄존한데도 가야가 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신라에 병합된 이래 아리송한 기록의 편린만 남긴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야사(伽倻史)의 경우 삼국유사 등 몇 안 되는 중요 사료조차도 설화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사료 비판을 통해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돼 있다.

    또한 가야사는 문헌사료의 절대 빈곤에다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까지 겹쳐 그 기본적인 줄거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가야의 자체 발전과정을 논하기보다는 신라나 백제, 왜(倭)와 같은 주변 세력에 의해 어떻게 종속됐는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3국을 통일한 신라의 지배 문화에 심취해 있는 동안 가야는 철저하게 잊혀져 한국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야마토 왕조가 가야의 터전인 경남지역을 경영했다는 식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까지 나왔겠는가.

    잊혀진 왕국, 가야의 국명은 어디에서 유래됐을까.

    가야는 낙동강 서쪽의 변한 지역에 있었던 여러 세력 집단이 성장한 나라다. 그 명칭은 출전과 시대에 따라 가야(伽倻, 加耶), 가라(加羅), 가락(駕洛), 구야국(狗邪國), 남가라(南加羅), 금관국(金官國) 등으로 다양하다. 금관국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쓰여진 것이고, 구야국은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나오는 국명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주로 가야(伽倻)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가야(加耶, 伽倻) 또는 가라(加羅)로 쓰고 있다.

    가야(GAYA)는 원래 인도 갠지스강의 지류에 위치한 한 성읍(城邑) 이름인데, 부처가 수도와 득도는 물론 설법을 편 유서 깊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불교가 유입된 후 낙동강 유역의 소국가군 중에서 종주국 격인 가락국과 나머지 5가야들도 지역명 다음에 ‘가야’라는 말을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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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시대의 대표적 조개무지인 회현리 패총과 가락국 최대의 생활유적이다. 가야시대 주거지, 고상가옥, 망루, 선박 등을 복원 설치해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가락국에 이어 차례로 5가야 건국

    가야의 영역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경계를 ‘동(東)으로 황산강(黃山江: 낙동강 하류), 서남(西南)은 창해(滄海: 남해안), 서북(西北)은 지리산(地理山: 智異山), 동북(東北)은 가야산(加耶山)의 남쪽’이라고 해 어느 정도 나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 유물이 낙동강 동쪽 일부와 호남 동부지역, 그리고 전남 광양만, 순천만 일대와 최근에는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 고분군도 가야의 것으로 확인돼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가 이 땅에서 사라진 지도 1500여년, 경북의 상주에서부터 성주, 고령을 거쳐 함안, 고성, 김해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700리의 광활한 유역을 중심으로 한 6가야의 500년 역사 현장마다 옛 가야인의 체취가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져 왔다. 500년이 넘는 동안 한반도 남단에서 독창적인 문화권을 형성해온 역사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고고학적 노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가야는 오랫동안 역사의 뒤편에 놓여 있다가 현대에 이르러서야 일부 대학과 문화재 관련기관들이 고분들을 발굴해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견실한 연구가 결실을 거둠으로써 가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폭넓은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됐다.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가(史家)들에게 외면당한 나라, 국내보다는 일본에서 관심이 높았던 나라, 최근에는 유적 발굴이 활발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나라, 잊혀진 왕국, 가야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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