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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2 (2) 박준/환절기

  • 기사입력 : 2017-07-07 15: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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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남편의 멱살을 잡은 건 지난 봄, 가까운 유원지로 드라이브를 가서였습니다.
    그녀가 운전을 하고 남편은 조수석에 앉았었죠.
    드라이브는 그녀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아이는 이런저런 과제들을 하러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그녀와 남편 둘이서 주말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녀가 유원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편은 놀라면서도 뭔가 체념한 듯 그녀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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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원지에는 하얀 오리배가 떠다니는 잔잔한 호수가 있었고,
    호수 너머에는 울창한 편백림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와 막 시작하는 연인들이 많았어요.
    벚꽃은 진작에 졌고, 푸릇푸릇 만물이 연두로 차오르던 때였죠.
    그러나 바깥 세상이 연두이건 분홍이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녀가 남편의 멱살을 잡았는데 말입니다.

    남편은 허술했습니다.
    아니, 순진하다고 해야할까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더니 한시간 넘도록 들어오지를 않은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녀가 밖을 내다보면, 주차장 귀퉁이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곤 했죠.
    평소에 잘 바르지도 않던 스킨 로션을 살뜰히 챙겨 발랐습니다.
    난데없이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물빠진 청바지를 찾아 입다 그녀에게 들키기도 했습니다.
    네. 남편은 너무 많은 증거들을 바닥에 흘리고 다녔습니다.
    한때는 그렇게 치밀하지 못한 남편의 성정에 오히려 마음이 끌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 그녀의 마음이 남편에게 끝없이 흘러갔었던 청춘에 말입니다.
    하지만 최근 그녀는 누군가의 허술함은 일종의 '죄'를 수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로부터
    '아빠 좀 잘 살펴봐… 가끔 새벽에 베란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전화하고 있어'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원지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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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길대로 성기어 웬만한 비밀들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엉성한 감시망,
    그녀가 가진 모든 아량과 너그러움을 조합해 만든 덕망 높은 빅브라더 혹은 판옵티콘.
    그녀는 모든 면에서 수월한 여자였고, 남편은 그것들의 수혜를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안에 치마폭처럼 겹겹이 쌓은 남편을 향한 믿음이, 곧 사랑이라 여겨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눈을 피해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 때문에 남편의 삶이 더욱 흥분되고 윤택해졌다면,
    설사 그 사랑이 영혼의 뿌리를 뒤흔들 정도로 운명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어린 아들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치우친 감정을 견인하여 스스로를 단련하고 정제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비로서의 책무가 아닌가.
    그것이 그녀와 맺은 혼약(婚約)의 이행이 아닌가.
    그것이 지난 겨우내, 바람 피느라 정신이 없는 남편에 대한 그녀의 '단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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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 끝자락, 사철나무가 길게 늘어선 공터에 차를 세운 뒤
    그녀가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은 '개새끼'였습니다.
    그리고 오른팔을 뻗어 남편의 멱살을 쥐었습니다.
    딱 한번, 아주 세게요.
    그녀는 남편의 눈을 그 어느때보다 분명하게 바라보았지만,
    남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남편은 두 눈을 꼭 걸어잠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것을 되감고 또 수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있겠죠.
    아주 뼈저리게 말입니다.

    그 여자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런 진부한 물음과 더 진부할 것이 뻔한 대답.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서사구조라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별안간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습니다.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았어요.
    오리배는 여전히 잔잔한 물결을 타고 흐르고 편백림은 여전히 푸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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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곧 여름이 오겠지요.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 그 시기를 다들 환절기라고 부르지요.
    그래요. 환절기. 그저 조금 혹독한 환절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계절이 달라지는 것뿐이라고.
    네. 이제 계절은 변할 겁니다.
    이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그녀가 사는 계절과 남편이 사는 계절은 달라질 겁니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남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언젠가 이 유원지의 고즈넉한 장면을 넘기며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울 날이 오겠지,
    그렇게 되어 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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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두 사람은 이 찬란한 계절이 다르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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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 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환절기'-박준/문학동네/당신의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4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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