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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마산의 애환- 조우성(경남도의원)

  • 기사입력 : 2017-07-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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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역사를 차치하고라도 마산은 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근대사적으로 1901년 공립소학교인 현 성호초등학교와 1909년 사립 창신학교를 중심으로 신학문 교육의 장이 열렸고 1919년 3·1독립운동, 4·3삼진독립의거 등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49년 ‘마산시’로 개칭과 마산항의 재개장, 1960년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의거,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1997년 3역 통합과 구마고속도로 개통,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진원지로 개발과 항거의 역사를 대변한다.

    산업화시대에 고속성장하면서 1989년 인구 50만 돌파로 이듬해 합포구와 회원구로 승격 설치가 되고 1991년 지방의원 선거에 이어 1995년 민선시장까지 함께 뽑는 제1회 전국지방동시선거를 기점으로 새로운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가도를 달리던 마산이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일합섬 공장 폐쇄와 수출자유지역의 쇠락으로 인구 감소가 이어졌다. 1995년 옛 창원군 5개 면의 마산시 편입으로 43만여명까지 회복세를 타기도 했으나 2010년 통합창원시 출범 당시 40만8008명으로 왜소해졌다. 대충 더듬은 마산의 애환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함은 쇠퇴한 마산의 회복을 위해 행정적인 통합이 불가피했다고 할지라도 근대 한국사에 있어서 마산은 민족의 수난과 영욕을 함께하며 자유대한민국을 주창했던 자긍심과 산업화를 선도하며 전국 7대 도시 성장모델로 기억돼 있어, 창원시로 통합은 이뤄졌지만 거룩한 ‘마산’의 이름만은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마산 3·15의거가 창원 3·15가 될 수 없으며, 부마항쟁을 부창항쟁, 마산역을 창원마산역, 마산앞바다를 창원앞바다, 마산 가고파를 창원 가고파로 강제할 수 없음이다. 이미 사라진 지명 회복운동을 벌여야 할 지경이나 우선 더 이상 명목적 훼손부터 차단하는 일이 급선무다.

    따라서 고유명사 변경을 신중해야 하고 마산의 이름은 영원하다는 것을 행정 관계자나 많은 관련단체들이 염두에 두길 바란다.

    조우성 (경남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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