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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확장되는 국도, 잃어버리는 자연유산- 이춘우(경상대 불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17-07-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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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타계한 철학자 박이문은 <길>이라는 수필에서 “한 사회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그리고 한 시대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 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 수도 있고 서사시가 될 수도 있다”고 썼다. 미국의 거대한 고속도로에서 서사시를 읽을 수 있는 반면, 한국의 논길이나 산길에서 따듯한 서정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스팔트 포장된 플라타너스로 그늘진 한국의 신작로도 아직 인간적인 호흡을 담고 있다고 썼다. 이 글이 쓰인 뒤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직’까지는 정겹다고 했던 아스팔트 왕복 2차선의 아름다운 국도들이 황량한 4차선 국도로 점점 확장포장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길에서 과연 어떤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불행하게도 경제적 효율성과 시장성의 논리만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삭막한 서사시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파헤쳐지고 망가지고 있는 것은 길뿐이 아니다. 최근 이십여 년 동안 국토는 신도시 건설, 재건축 사업, 부동산 개발 등 각종 개발 광풍에 몸살을 앓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발 열풍에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는 산학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캠퍼스 난개발이 가속되었다. 19세기 중반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을 보며 시인 보들레르는 <백조>라는 시에서 “옛 파리의 모습은 지금 간 곳이 없구나. 도시의 모양은 사람의 마음보다도 더 빨리 변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우리는 이제 국토가 너무나 빨리 망가지는 것을 한탄해야 할 판이다.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원활한 교통을 위해 추진되고 있다는 국도 확장포장 공사가 면밀한 경제적 타당성 조사, 환경영향 평가, 지역 주민들의 합의, 장기적 국토 자연 경관 보전의 종합적 고려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일례로 현재 절반 정도 공사가 마무리된 하동~화개 간 19번 국도 확장포장 공사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고 봄이면 벚꽃이 만발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이 ‘하동 포구 백 리 벚꽃길’의 명성은 이제 추억으로나 간직해야 할 판이다.

    2004년 공사가 추진될 당시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최대한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친환경적인 도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완공된 하동~악양 구간은 일부 구간에서만 옛 정취를 희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여느 직선화된 4차선 도로와 다를 바 없는 황량함만이 남아 있다.

    현재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악양~화개 구간은 추진 당시 많은 환경단체들이 우려했던 대로 대규모 환경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벚꽃 피는 4월초와 여름 휴가철에나 교통이 정체되고 그 외 시기에는 비교적 한산한 이 아름다운 도로를 왜 확장하기로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관광객들이 화개 일대의 지리산 자락을 많이 찾는 이유는 벚꽃길이 안내해주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수려한 자연경관 때문일 텐데, 빠른 접근을 돕는다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파괴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전국의 확장포장된 국도들이 인적이 끊긴 유령 도로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도로 확장포장에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차라리 출산 장려와 지역 문화 발전, 그리고 사회복지를 위해서 지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박이문은 “바쁘고 부산한 고속도로, 큰 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길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박자로 맞출 수 없는 비인간화된 삶의 형태를 체험한다. 그렇다면, 인간적 체온이 풍기는 길을 잃어갈 때, 우리는 인간을 잃게 될는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다음 세대에게 인간적 정취가 전혀 없는 황량한 길들만을 남겨줄 작정인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도로나 아파트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이춘우 (경상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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