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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제2인생 사회에 바치는 허만선 전상군경 1급 국가유공자

전쟁·고엽제·식물인간 이긴 오뚝이 “덤 인생 나누며 살고파”
1967년부터 34개월간 베트남전 참전
1978년 갑자기 의식 잃고 쓰러져

  • 기사입력 : 2017-07-27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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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 10월 3일이었다. 이날 쓰러져 의식불명으로 11년여간 식물인간으로 지냈다. 죽었다가 의식을 찾아 다시 살고 있다는 전상군경 1급인 국가유공자 허만선(71·창원시 마산회원구)씨의 이야기다. 허만선씨는 지난 1967년 군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병마와 싸우고 있다. 자신의 몸도 가누기가 힘이 들지만 숭고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 희생된 고엽제 피해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또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매일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허씨를 만나 그가 다시 사는 삶을 들었다.

    허만선씨는 진주에서 태어나 1965년 진주농고를 졸업했다. 이후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입대해 백마부대 29연대 소속으로 1967년 11월부터 1970년 9월까지 2년 10개월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만기 제대하고는 부산의 금속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도산의 위기에 처한 공장을 인수했고 성심껏 운영하면서 직원 수가 30여명에서 200여명까지 느는 등 안정을 찾아갔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아침 출근길, 허씨는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다 쓰러졌다. 그날은 절대 잊을 수 없는 1978년 10월 3일이었다. 그는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갑자기 쓰러졌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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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허만선씨가 자신의 서재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성승건 기자/



    허씨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20일 정도 의식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이후로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면서 “24시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경련이 왔다. 사지는 차츰 굳어지고 의식이 흐려져 갔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에는 아내가 고생한 세월만 담겨 있었다. 그는 “어린 자식 둘 데리고 우리 집사람이 정말 고생 많이 했지”라며 “아내는 나를 데리고 전국 일류병원을 몇 년이나 쫓아다녔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야 떠밀려 병원문을 나섰다”고 했다. “기도원도 가고 무당 굿도 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라며 “결국 아내는 의식 잃은 나를 데리고 진주 선산 밑의 폐가로 들어갔다. 빈털터리가 되고 죽을 거라고 들어갔는데, 아내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고 했다.

    허씨의 아내 하봉자씨는 “남편이 죽을까 너무 겁이 났다. 너무 힘든 세월을 보내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고 전했지만, 허씨는 그때 “여보, 당신이 살아만 있어도 우린 행복할 수 있어요”라며 되뇌었던 아내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1989년 11월 27일 허씨는 기적처럼 눈을 떴다. 허씨는 “환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모든 게 흐릿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몸이 활처럼 굽어 있었다. 늘어나고 오그라들고 손가락,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게 없었다”고 했다. 이후 “감각이 돌아오고 마비가 서서히 풀리는 데 2년 정도 걸렸다. 쓰러진 그날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두 번째로 사는 인생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보람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누워 있는 동안 그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지냈다. 읽어주는 시와 수필에 마음이 편해져서, 자신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에다 볼펜을 묶어 글을 쓰곤 했다.

    그는 쓰러졌던 이유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됐다. 허씨와 같이 베트남전 참전자들이 겪는 원인 모를 질병이 고엽제와 연관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고엽제는 미군이 베트남전쟁에서 정글이 적의 은신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차별 살포한 맹독성 물질이다. 이 안에는 다이옥신이라는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들어있다. 청산가리의 1만배, 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소는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돼 각종 암과 신경계 손상 등을 일으킨다. 그는 천벌과 같은 내 병이 내 죄로 인한 것이 아닌, 이 빌어먹을 고엽제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실상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을 증거로 청와대와 국회, 국가보훈처 등에 호소하고 또 글을 써서 32만 월남 참전 용사들의 한을 푸는 데 앞장섰다. 1993년 ‘고엽제 환자 등의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큰 역할을 하고, 그해 말초신경병 등의 질환으로 국가유공자로 등록될 수 있었다. 이듬해 7월 자신의 삶을 다룬 국군영화가 제작돼 전국 방송에 나가고 다큐멘터리도 전파를 탔다. 이후로 고엽제 피해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나 현충일, 광복절 특집이면 빠짐없이 주인공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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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만선씨가 받은 대통령 표창과 훈장들.



    손에 펜을 묶고 악착같이 글을 쓰며 고엽제의 억울한 피해자로 당당히 세상에 나선 덕이었다. 중·장편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수기, 각종 매체에 투고한 칼럼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인간승리상’, ‘참전수기 대상’, ‘투병 문학상’ 등이 뒤따라온 상이다. 저술가로 활동하면서 군부대나 학교 등에서는 안보 강연도 했다. 그 공로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신한국인상, 한국보훈대상,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과 국민포장 등 수차례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2년부터 이러한 활동으로 모은 강연료나 인세, 상금, 보훈 급여 등으로 투병 중인 전우나 영아원, 보육원, 양로원 등에 기부했다. 보훈가족 중 생활이 곤란한 가구의 자녀에게는 장학금을 전달해 ‘허만선 장학회’도 생겼다. 진주에서 투병 중일 때는 진주보훈지청에서, 허씨가 창원으로 전입한 후 지난 2014년부터 창원보훈지청에서 장학금 수여식을 열고 있다.

    허씨가 말하는 현재 건강 상태는 말초신경병과 폐기종, 신부전, 담낭과 담도 종양, 골수종, 치아 상실, 면역체계 이상 등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그렇지만 지금도 선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방 한쪽에 고이 모아둔 편지에서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한 학생의 편지에는 “천금보다 귀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장학금을 정말 소중하게 헛되지 않게 사용하겠다”며 “선생님의 뜻처럼 부모와 웃어른을 존경하고 개인보다 남을 위해, 또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허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감사함을 느낀다”라며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10년씩 누워만 있으면 인생이 어떻게 느껴지겠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만 생각하며 살았다. 사회가 각박한데 너무 아웅다웅하지 말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인류 최대의 비극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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