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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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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9) 오세복/밤배

  • 기사입력 : 2017-08-04 14: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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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옆자리 동료가 휴가는 어디로 갈 예정이야? 라고 물었을 때
     난 이미 다녀 왔어, 밤배를 탔거든. 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소하다 못해 미미한 것들,
     그러나 알고보면 가장 중요한 삶의 비의(秘意)를 숨긴 것들.
     그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사사건건 타인의 이해를 구하며 떠들기엔 이제 난 조금 진중해져야 할 나이다.
     나는 입을 다무는 대신 지갑을 챙기며 마실 것 좀 사올게,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걸 밤배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다.
     밤바다에 뜬 배라고 하기엔 어딘가 좀 허술하고 초라하지는 않은가.
     
     내가 탔던 배는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긴 했지만
     결코 적정한 속도나 일정한 깊이로 궤적을 그리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배라고 부를만큼 늠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고 여린 포유류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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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거주춤 서 있던 모래사장에서 그가 보인 건 편편한 등이었다.
     그는 대뜸 업히라고 말했고 나는 조금 망설였다.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짚으니 그가 내 엉덩이를 서툴게 추어올렸다.
     
     와.
     곧 입에서 탄성 비슷한 것이 터져나왔는데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눈높이와 그림자의 모양, 공기마저 달라졌다는 생경함 때문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겨 조금씩 앞으로 나갈 때마다
     길은 비스듬히 누웠고 숲은 부풀었고 바다는 바깥으로 물러섰다.
     이마 위로 부쩍 다가온 것은 하늘, 가슴에 맞닿은 것은 그의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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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계춘할망' 스틸컷.

     외할머니는 어렸던 나를 업고
     귀녀(貴女)야 귀녀야 할머니 등에 업혀라 할머니 등에서 잠들어라 노래를 불렀다.
     외할머니는 일제시대에 드물게 중등교육을 받아 글을 읽고 셈을 했다.
     전답이 많아 머슴을 여럿 부리는 집 맏며느리로 살며 끼니마다 차려낸 상이 수도 없었지만
     자수도 잘 놓고 재봉틀을 능숙하게 다루어 예쁜 때때옷도 곧잘 만들어주었다.
     자식들이 독재타도를 외치다 경찰서를 드나들고 안방까지 형사들이 들이닥쳐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다'며 스스로를 엄격하게 단속할만큼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등에 업은 외할머니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밤배였다.
     글도 모르고 셈도 모르고 살림도 살 줄 모르는 바보천치 둥실둥실 작은 밤배였다.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등에 두 볼을 번갈가며 부볐고,
     그녀는 능소화가 뚝뚝 고개를 떨구는 마당가에 서서
     하루에 단 한 번밖에 볼 수없는 저녁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꼬랑지처럼 달랑대는 내 짧고 통통한 다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자꾸자꾸 노래를 불렀다.
     귀녀야 귀녀야 우리 귀녀야 할머니 등에 업혀라 할머니 등에서 잠들어라.
     
     나는 그녀의 등에서 퇴근하고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보고싶은 엄마,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엄마의 등, 엄마의 엄마의 등에서 나는 엄마 냄새.
     옅은 잠 속에서 강물처럼 넘실대는 꿈, 나비처럼 살랑대는 꿈, 그런 꿈같은 꿈들을 나는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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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음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음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밤배'- 작사 오세복/작곡 이두진/노래 둘다섯(1970)
     
     
     눈을 부릅뜨고 찾아다니지 않아도 거기엔 이미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
     누군가의 등에서 자장가를 청해 듣던 따뜻한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
     그래, 그것들을 밤배라 불러야 하나보다.
     정말 그래야 하나보다.
     
     어렸던 여름밤, 그리고 얼마 전 모래사장에서 내가 안기고 나를 안았던 그 무엇.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 노를 저어 은하수 건너가
     끝없이 자꾸만 떠가고 떠가, 어디서 잠들지 알 수 없는 밤배.

    메인이미지

     그러나 나도 알고 있고 그도 알고 있다.
     여차하여 어긋나면, 나는 그를 버릴 것이고 그도 나를 버릴 것이다.
     간결하게는 헤어진다고들 할 것이고 아름답게는 연(緣)이 다했다고도 표현하겠지만
     뭐라고 말해도 이제는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다.
     
     물론 살면서 때때로 불현듯 떠올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느 뜨거운 모래사장에서 한 여자를 업었던 기억이나 한 남자에게 업혔던 기억 같은 거.
     서로의 등과 가슴에 닿았던 그것이 대체 무슨 마음이었는지에 대한 때늦은 의문 같은 거.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모래사장 끝까지 손깍지를 풀지 않았던 남자
     그것이 최고의 휴가였다고 여기며 혼자 수줍게 웃는 여자
     그런… 그런 것들이 아주 흔한 사소함으로 남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훗날 내게 있을지 모를 나의 딸과 나의 딸의 딸,
     다리가 통통하고 볼을 잘 부비는 귀녀에게 들려줄 노래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정말 그런 것 같지 않느냐고, 휴가철이 모두 지난 초가을 쯤
     옆자리 동료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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