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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7) 소가야(小伽倻)

수로왕 막냇동생의 나라… 소박하지만 찬란했다
삼한시대 부족사회에서 시작
현재 고성 일대가 왕국 영토

  • 기사입력 : 2017-08-2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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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소가야(小伽倻) 땅 고성(固城)에는 왕국이 실존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작은 왕국의 고도(古都)다운 분위기도 아니다. 6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말로(末露)가 가락 건국 15년 후인 서기 57년, 지금의 고성지방에 나라를 세운 후 9대 이형왕(而衡王) 29년(서기 532)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475년간 이어져 왔으나 막내 왕국답게 소박하고 조용히 나라를 경영해온 까닭이다.

    고성은 삼한시대의 변진(弁辰) 12국 가운데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또는 포상팔국(浦上八國) 중의 한 작은 부족사회인 고자국(古資(自)國) 또는 고차국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부족사회가 삼국시대에 이르러 다른 5가야와 함께 소가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이에 대한 역사기록은 아주 미미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그 지명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소가야의 실체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책에 보이는 고성의 지명은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는 고자국(古自國)으로, 삼국유사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고사포(古史浦)로 나타난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소가야(小伽倻)로,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欽明) 5년조에는 구차(久嗟)로 적혀 있고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지 한전(魏志 韓傳)’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고성은 한·중·일 3국의 역사기록에 모두 나타나는 가야소국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가야 왕국 실체 규명에 어려움

    소가야는 건국에서 멸망까지 18읍을 영토로 다스렸다. 도읍지인 지금의 고성읍에서 가까이는 15리, 멀리는 67리까지 떨어진 마을도 있었다. 그러나 진한지역을 통일한 신라는 차례로 가야지역을 흡수, 22대 지증왕(智證王)대에 이르러 소가야는 완전히 세력을 잃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지금 고성지역은 옛 소가야 왕국의 실체를 유추할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다. 고성읍을 비롯한 주변지역에 고분이나 산성 등이 있기는 하지만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만 될 뿐 소가야의 실체를 규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소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으로는 고성읍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과 동해면 내산리고분군(사적 제120호), 율대리고분군, 연당리고분군, 오방리고분군, 사천 예수리고분군, 진주 중안동고분군, 가좌동고분군 등의 무덤유적과 고성 동외동조개더미 등의 생활유적이 있다. 그 외 몇 군데의 성터가 소가야 역사를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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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가야 왕족들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고분군.



    ▲왕족 무덤인 송학동고분군

    고성읍 송학리 야트막한 구릉 무기산(舞妓山)에 있는 송학동고분군(松鶴洞古墳群)은 소가야 당시의 왕족 및 장군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이 고분들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발굴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쳐 대부분 도굴되었다.

    송학동고분군은 무기산 정상부의 1호분을 중심으로 현재 7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1호분은 직경 33m, 높이 4.5m에 이르는 큰 고분이며 나머지는 직경이 10~16m 정도이다. 1호분은 일부 노출된 뚜껑 돌로 보아 내부구조는 깬 돌로 묘곽의 네 벽을 쌓고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가야지역 고분들의 일반적인 형식인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가야시대 왕족과 귀족들이 이곳에서 기생(妓生)들을 불러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기던 곳이라 하여 그 당시부터 이곳을 무기정(舞妓亭)이라 불렀다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인근 기월리에는 1기의 대형 고분이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소가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98년과 1999년에 발굴한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東海面 內山里) 산 185-1 일대 가야시대 고분에서는 토기류인 영락부유대장경호와 철기류, 장신구류 등 80여 점이 발굴돼 소가야의 실체 규명과 매장문화, 주변국 문화교류 등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또 가야고분에서는 기대(器臺), 단경호, 대부호, 고배, 장신구류 등 신라 백제와의 교류를 반영하는 유물들이 대량 출토됐다.

    특히 유물 중에는 몸통 중앙부에 고사리무늬가 3곳에 붙어 있는 받침 달린 항아리(臺附壺) 2점과 트로피 형태의 대부호 2점, 전체가 철제품으로 된 등자(子:말의 안장에 달아서 양 옆구리로 늘어뜨려 두 발을 디디는 제구) 등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고성읍의 중심부에 위치한 동외리 유적지에서는 중국계 일본계 유물들이 발견되어 고성지역이 가야시대에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해왔음이 증명되고 있다.

    또 동외동 조개더미에서는 제사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새무늬청동판(鳥紋靑銅器)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에는 큰 새 두 마리를 중심으로 모두 42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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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지역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각종 토기류.



    ▲거류산성 등 가야시대 성곽으로 알려져

    왕의 무덤을 비롯한 큰 고분이 왕족 또는 나라의 위엄을 나타낸 것이라면 성곽은 세력을 나타낸 유적이다.

    옛 소가야 지역에는 확실한 유적이라고 할 만한 성곽은 없지만 거류면의 거류산성(巨流山城)과 동해면의 철마산성(鐵馬山城), 고성읍의 고성성지(固城城址) 등이 소가야 때 축성되었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류면 중앙에 우뚝 솟은 거류산 정상부를 둘러싼 거류산성은 소가야 때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또 어느 왕이 축성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한편 고성읍 성내리(城內里), 수남리(水南里)와 동외리(東外里) 일대는 소가야의 왕궁터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고성읍성과 왜성터가 일부 남아 있긴 하나 이곳이 가야 왕궁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인접한 송학동고분군이나 동외리패총, 만년사 토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시대의 도성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소박한 국가경영으로 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던 6가야의 막내왕국 소가야. 자체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한 데다 유적 유물도 미미해 소가야의 실체를 증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지만, 1500여년 전 경남의 서남부지방에 꽃피웠던 찬란한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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