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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만난 군함도-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기사입력 : 2017-08-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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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다. 폭염경보가 내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지만, 제주도의 산과 바다를 보니 무더위조차 즐거움이 되었다. 이효리가 살고 있는 소길리 근처 펜션에 짐을 풀고 주변 탐사에 돌입했다. 제주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오름 탐방을 위해 미리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거문 오름 답사길에 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소낙비를 뚫고 우의를 입고 들어간 거문 오름은 실로 놀라웠다. 거대한 분화구는 편백나무로 가득해 원시림을 방불케 했다. 오름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밀양 얼음골처럼 시원한 공기를 내뿜는 풍혈(숨골)이 곳곳에 있었다. 자그마한 동굴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가 너무 신기해서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그런데 냉기가 나오지 않는 동굴이 꽤 보여 그 정체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자연 동굴이 아닌 일본군이 연합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주둔지이거나 갱도 진지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군은 오키나와에 이어 본토까지 점령당할 위험에 빠졌다. 당시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거쳐 제주를 거점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제주는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에 지하 벙커와 진지를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게 된다. 한시라도 빨리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군은 제주도민은 물론 육지의 사람들을 강제 징용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갱도 진지가 거문 오름에만 10여 곳이었고, 360여 개의 오름 중 120여 곳에 진지가 구축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 일대에 동굴 진지를 만들었다. 송악산과 성산일출봉, 서우봉, 수월봉, 삼매봉 등에 동굴을 파고 함정을 공격할 대포를 배치했다. 송악산의 주상절리에 특이한 굴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모두 군사용 진지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의 서글픈 역사다.


    송악산 바로 옆에는 넓은 평지가 있는데 각종 채소를 재배하는 밭이다. 그런데 이 밭의 중간에는 뜬금없게도 오래된 활주로가 있고, 풀로 뒤덮인 비행기 격납고가 듬성듬성 보인다. 일명 알뜨르(아래 벌판) 비행장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 제주국제공항으로 사용하는 정뜨르 비행장과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군사시설이었다. 제주는 일본 본토 비행기가 알뜨르 비행장에서 재주유한 다음 상하이, 베이징, 난징까지 공습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였다. 패색이 짙어진 전쟁 말기에는 자살특공대로 유명한 가미카제를 위한 조종 훈련을 했다고 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실제로 제주는 한림을 비롯해 몇몇 해안 지역에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고 한다. 깊은 산속까지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 이유도 이러한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는 제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관광지다. 동남아를 가야 만날 수 있는 에메랄드빛 해변이 곳곳에 있으며, 중산간은 가는 곳곳이 그 어떤 휴양림 부럽지 않은 숲 천지다. 화산활동의 결과 생성된 수백 개의 오름은 제주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제주의 아픈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다. 해방 이후 4·3사건까지 경험한 제주는 식민지, 전쟁, 대량학살, 이념투쟁과 같은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온전히 껴안고 있다. 최근 개봉한 ‘군함도’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삶의 아픔이 제주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이유다. 마침 9월에 제주도립미술관 주최로 ‘투어리즘’을 주제로 한 비엔날레가 개최된다고 한다. 장소를 소비하는 관광이 아닌 장소를 이해하는 여행으로서 ‘투어’를 상정했다니, 제주비엔날레를 통해 마주하게 될 제주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김재환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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