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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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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남저 이우식을 생각한다- 김상철(의병박물관장)

  • 기사입력 : 2017-08-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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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라의 위기 뒤에 부는 바람은 늘 변화와 개혁이었고, 기득권자는 변화와 개혁을 꺼렸다. 변화나 개혁이 곧 그들이 누렸던 기득권의 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모든 기득권자가 수구적이지는 않았다고.

    여기에 소개하는 남저(南樗) 이우식(1891~1966)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의령 출신으로 만석지기의 지주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득권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일제강점기 위기의 시대에 그의 재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에게는 소작료를 탕감해 주었고, 흉년에는 백성의 구휼에 앞장섰다. 인재 양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상해 임시정부에 거금의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그리고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 재정을 지원하였으며,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와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가 쌓아 온 명예를 기반으로 주변의 끊임없는 정·관계 진출에 대한 회유와 권유가 있었지만 조국이 통일되지 않은 현실에서 결코 자신의 길이 아님을 역설하며 사양하였다. 한평생 기득권자였으나, 한순간도 기득권에 취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은 “그는 특히 민족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과묵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람으로, 남에게는 숨어서 선행을 베풀되 자기 자신은 항상 근검절약하며 평생 이름 내놓기를 원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 사람들이 많이 다녔을 법한 의령 땅, 한길 동네 어귀에는 작고 초라한 그의 시혜비나 구휼비들이 세워져 있다. 가난한 소작농, 민초들이 그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없는 살림에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세운 것이다. 늦은 여름 오후 출장길에 마주한 무성한 잡초 속의 초라한 비(碑) 하나, 합천이공우식시혜비(陜川李公佑植施惠碑), 민초들의 고마움의 표현이다. 강압적 자발에 의해 남발되었던, 이수나 귀부로 장식된 기득권층의 화려한 송덕비가 부럽지 않은 까닭에 내 발걸음이 가볍다.

    김상철 (의병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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