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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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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9) 성산가야(星山伽倻)

아련하게 남은 역사 흔적… 깨어날 준비하다
실체 증명할 기록·유물 부족
삼국유사 ‘가락기찬’서 언급

  • 기사입력 : 2017-09-0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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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로왕 넷째 동생 벽로(碧露)가 건국

    성산가야(星山伽倻)의 고도(古都)인 경북 성주 (星州)에는 옛 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주 땅은 가야문화권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성주는 가야역사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벽진가야(碧珍伽倻)라고도 불리는 성산가야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네 번째 동생 벽로(碧露)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관련기록과 유적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은 탓이다.

    성주군청의 성주군 연혁과 역사소개에서조차 이 고장은 ‘기원후 1~3세기에는 소국(小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기원후 4세기경에는 성산가야로 발전했다’ 정도로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이곳 성주지방을 6가야 중의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성주 땅에는 성산가야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고 또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성산가야는 언제 건국됐고 시조는 누구이며 몇 대 왕까지 몇 년간의 역사를 가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성산가야의 실체나 성주가 성산가야의 고도(古都)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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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알려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성산동고분군, 보수·정화사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삼국유사 5가야(五伽倻)조 ‘가락기찬(駕洛記贊)’에 의하면 ‘한 자색(紫色)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主)가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國)이 다섯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석(註釋)을 달고는 ‘아라가야(阿羅伽倻,咸安), 고령가야(高寧伽倻,咸靈), 성산가야(星山伽倻,京山 혹은 碧珍), 소가야(小伽倻,固城)라 하였고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천복 5년(太祖天福 五年)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 번째가 금관(金官), 두 번째가 고령(古寧), 세 번째가 비화(非火),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성산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성산가야의 실체는 틀림이 없으나 경산(京山)이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를 중심으로 한 지명이라면 이곳 또한 도읍지임에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산가야의 고도(古都)답지 않게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왜 이렇게도 없는가 하는 점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성주는 비교적 좋은 지리적 조건으로 삼한시대부터 주변에 여러 부족사회들이 있었다. 서기 42년 가락국 건국을 시작으로 여러 가야가 들어설 무렵 이곳 성주지방에서도 주변의 여러 부족사회를 통합해 성산가야가 건국됐다.

    성산가야는 낙동강변의 비옥한 농토와 가야산 등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6세기 전반 신라가 가야지역에 진출함에 따라 성산가야는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돼 본피현(本彼懸)이 설치됐다.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신안현(新安懸)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라말기에 벽진군(碧珍郡)으로 승격됐다. 따라서 성산가야를 벽진가야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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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성산동고분군 38호분에서 발굴된 유개단경호 (有蓋短頸壺), 계명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싱거운 역사 흔적

    성산가야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망했는지 알 수가 없어 역사도 싱거울 수밖에 없지만 성산가야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줄 유적이 없지는 않다.

    성주에는 성주읍 성산리에 사적 제86호인 성산동고분군(星山洞古墳群)을 비롯해 270여 기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군은 성산(星山, 해발 389.2m)의 북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번호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는 것은 129기이나 파괴돼 멸실됐거나 봉토(封土)가 깎여나간 고분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 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성산 아래 성산리, 선남면 신부리, 용암면 장학리 등에 흩어져 있는 이 고분군은 성산가야의 왕족 또는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전해온다.

    이 고분군은 일제시대 때 대부분 도굴돼 완전한 고분은 몇 기에 불과하다.

    고분의 구조는 직사각형으로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돌방의 벽은 평평하고 큰 돌을 몇 개 덮은 후 한쪽 입구 역시 돌을 쌓아 막은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다.

    이와 함께 작고 간략한 형태로 돌을 쌓아 만든 돌널무덤(石棺墓)이 있어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관을 비롯해 동·철제품, 자기, 도기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성산가야시대로부터 신라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석기와 철기의 병용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도 성주군에는 금수면 명천리, 대가면 옥화리와 도남리, 월항면 인촌리 용각리 등에 크고 작은 고분이 흩어져 있다.

    성주에는 가야백성들의 피난지였다는 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이라고 하는 가야산성지 (伽倻山城址)가 있다.

    가야산 상봉에서 산줄기를 따라 수륜면 백운리 중기마을 뒷산에 이르는 높이 1.5m, 길이 4780m가량 되는 산성이다. 산줄기를 따라 돌로 쌓았기 때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더러 있으나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져 완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중기마을 뒷산 봉우리다.

    산성의 길이는 10리가 넘는 거리이나 허물어져서 성을 따라 길을 다닐 수 없어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산성의 길이가 수십리나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산성의 끝인 중기마을 뒷봉우리에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 주위 1만5935척, 높이 5척’이라 기록돼 있을 뿐 언제 어떤 구실로 성을 쌓았는지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역사 보존하려는 노력 곳곳에 엿보여

    지금 성주에는 옛 가야의 아름다운 문화전통과 역사의 향기를 찾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엿보인다.

    성주군은 고분군을 보수·정화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의 발굴사업을 통해 옛 성산가야 고도(古都)의 풍모를 되찾을 목표를 갖고 있다.

    군은 20여년 전부터 보수·정화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이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성산동고분군의 반듯한 봉분 등에서 잊혀진 성산가야 500년의 옛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앞으로 성곽 복원, 유물전시관 등이 건립되면 옛 성산가야의 역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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