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8일 (목)
전체메뉴

[가야역사를 찾아서] (11) 비화가야(非火伽倻)

창녕 일대 비사벌땅, 유물·유적 많아 ‘제2의 경주’
삼국유사에 ‘대가야 추정’ 기록
순수비 때문에 ‘신라 영역’ 인식

  • 기사입력 : 2017-09-19 07:00:00
  •   
  • 메인이미지
    창녕읍 화왕산 자락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걸쳐 있는 사적 제514호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제2의 경주, 가야시대 유적 유물 즐비

    창녕은 화왕산(火王山) 기슭에서 낙동강 연안의 벌판을 거느리고 있는 옛 가야의 도읍지이다. 창녕읍내로 들어오는 길목 여기저기에는 선사시대 지석묘부터 시작해서 비화가야 고분이 낙타등처럼 늘어서 있다. 잊혀진 왕국, 가야의 500년 역사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엉켜 있는 가야시대 고분들이다.

    영남의 중추인 낙동강의 자양으로 번성해온 창녕은 ‘제2의 경주’로 불릴 정도로 가야시대의 유적 유물이 많다. 따라서 창녕은 그 옛날 영남문화권의 중심지였음이 수많은 유적 유물에서 증명되고 있다. 창녕에는 국보 2점, 보물 9점, 사적 5곳을 비롯해 경남도 지정문화재 16점, 경남도 문화재자료 16점, 향토문화재 25점, 일반 동산문화재 38점, 기타 4점 등 모두 115점이나 흩어져 있다.

    창녕읍 교리 송현리 일대에는 왕릉으로 불리는 거대한 무덤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현재 24기가 복원돼 있다. 계성면과 영산면 일대에도 수많은 고분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 그 옛날 이곳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해주는 증언자인 셈이다.

    창녕은 옛날 부족사회인 불사국(不斯國)에 이어 국가체계를 갖춘 비화가야(非火伽倻)로 존립해 오다가 신라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된 후로는 비자화군(比自火郡), 비사벌 (比斯伐) 또는 비자벌(比子伐)이라 했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태조(太祖) 23년(940) 3월 화왕군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으로 고쳤다.

    ▲삼국유사에 비화가야 표기

    창녕땅에 과연 비화가야가 존재했을까.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가야시대의 창녕은 삼국사기에는 비자화(比自火) 또는 비사벌(比斯伐)로, 진흥왕 순수비에는 비자벌(比子伐)로,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비화가야(非火伽倻)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창녕을 어엿한 가야국명으로 표기한 점이 눈길을 끈다. 따라서 창녕은 여러 가야국 가운데 하나의 독립국가인 비화가야 왕도(王都)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화가야를 일연(一然)선사는 삼국유사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 ‘아마 대가야일 것이다’라는 단서를 달아 오늘날 혼란이 되고 있다. 본조사략에는 가야연맹체에 있어서 맹주인 대가야의 이름이 빠졌는데 이는 일연선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큰 착각이 아니었을까.


    메인이미지
    2015년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토기들.

    ▲창녕은 비화가야의 고도(古都)

    비화가야는 창녕읍 일원을 중심으로 영산 현풍 계성을 포함한 대영역이었다. 창녕에는 지금까지 가락국의 김해나 대가야국의 고령처럼 역사기록이 없고 진흥왕 순수비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신라문화권 영역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창녕의 향토사학자들과 연구단체들은 창녕을 비화가야의 고도(古都)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동·송현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의 묘제가 모두 가야묘제로 되어 있으며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220여 기이고 계성고분군이 200여 기라 하는데 이 중에서 신라묘제는 단일 기인 교동고분군 제12호분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중 주분인 제7호분과 89호분, 91호분에서 나왔다는 왕관은 금동관(金銅冠)으로 가야왕관이다. 순금으로 굽이 높다란 신라왕관과 비교할 수 있다.

    셋째로 교동·송현동이나 계성의 고분출토 유물 중 장신구, 무구류(武具類), 마구(馬具), 철기, 토기가 모두 가야유물이다. 특히 경질토기(硬質土器) 가운데 유개고배(有蓋高杯)의 뚜껑 꼭지가 좀 높은 것은 창녕토기의 특징을 뚜렷이 하고 있다.

    ▲신라에 멸망 후 문화말살

    신라는 창녕을 하주(下州) 또는 완산주(完山州)라고 하였다. 561년에는 순수비를 세워 이때부터 비화가야의 문화는 말살돼 가고 대신 신라라는 새로운 문화를 접해서 차차 신라문화화돼 갔다.

    비화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이어서 가야 전역이 신라 영토에 들어가자 자연 가야고분은 신라병합기의 고분으로 전환돼 갔다. 이에 고분문화도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고분군이 있는 교동과 송현동에서는 가야토기 및 가야 마구(馬具) 등 많은 유물이 출토돼 창녕땅에 고고학적으로 고대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도굴된 창녕 교동 7호분에서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형태와 유사한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돼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일본학자들의 논문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힘겨운 역사복원 작업

    가야토기는 김해와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유적지에서 대부분 출토됐다. 그러나 창녕은 낙동강의 동안(東岸)이지만 교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토기와 환두대도이다. 그렇다면 교동고분군은 가야국의 무덤임이 분명해진다. 토기는 신라토기보다는 고식을 띠고 있다. 즉 보다 덜 장식적이라든지, 이형토기의 경우 상징적인 측면이 신라토기보다 소박하다든지 하는 점 등이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가야토기와 똑같다.

    이러한 여러 정황에도 불구하고 비화가야가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학계에서도 독립왕국 비화가야의 실체에 대해 심증은 가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다.

    지금 가야문화권의 각 고도(古都)마다 열성적으로 고대 가야왕국의 문화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창녕에서도 찬란했던 비화가야의 얼을 계승하고 역사를 연구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창녕군과 향토역사연구가들도 경주 다음으로 문화유적 유물이 많은 창녕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역사를 잃어버린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스스로 자료를 수집하는 등 힘겨운 역사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창녕군은 경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에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 그리고 기념물 제3호인 계성고분군을 등재 대상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해 두고 있다. 비화가야가 어쩌다가 6가야에서 제외가 됐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언젠가는 창녕땅 곳곳에 널려 있는 수많은 가야시대의 유적 유물에서 비화가야(非火伽倻)의 이름을 되찾을 것이란 기대를 해본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