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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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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음력과 양력 - 황현산 (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7-09-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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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이 눈앞에 다가왔다. 추석은 물론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명절이다. 우리에게는 음력 날짜를 짚어 쇠는 명절이 아직도 여럿 남아 있다. 설과 대보름이 그렇고, 단오와 백중이 그렇다. 이 명절들이 이름만으로도 존속하는 한 음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향이 서남해안지방인 우리 집은 언제나 섣달 그믐날에 차례상을 차려 왔다. 그 섣달이나 그믐이 늘 음력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지만, 어쩌다 양력설을 쇨 뻔한 적은 있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 배운 자식들의 권에 못 이겨 신정 과세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 어머니가 차례상을 준비하던 중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손에 든 접시를 내려 놓으셨다. “오늘 차례 못 지낸다. 어찌 섣달그믐에 달이 뜬단 말이냐.” 양력과 음력의 개념과 차이에 관해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떤 설명도 설날의 밤하늘이 지녀야 하는 유현한 기운을 어머니의 마음속에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바닷가 사람들인 우리 가족에게 시간은 늘 썰물밀물과 연결돼 있다. 이 시간의 리듬은 곧 달의 숨결이며, 우주의 율려(律侶)이다. 이 박자를 짚어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적어도 바닷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사리 때인 보름이나 그믐에는 날이 맑고 그 사이에 있는 조금 때는 비가 온다. 흘러가는 시간을 균일하게 분할해 놓은 것이 달력이지만 거기에는 천지의 리듬도 함께 표시된다. 보름에는 만월이고 삭망에는 달이 없다. 봄이 오고 가을이 오는 태양의 변화야말로 간만의 변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리듬이지만 그것은 강한 권력과도 같기에 리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법칙처럼 여겨진다. 사실상 양력에 해당하는 24절기는 책력에서 지극히 합리적으로 배열됐지만 달력의 씨실이 되는 것은 월과 일이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짓고 제사는 날짜에 따라 지낸다. 양력에는 공식적인 삶이 있지만 음력에는 내밀한 삶이 있다.

    아마도 ‘양력 설’이 어머니를 실망시킨 데는 그믐밤의 중천에 달이 떴다는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저 시간의 리듬과 연결돼 있는 삶의 내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조금의 썰물에 너른 갯벌에서 게를 잡고 조개를 주웠던, 삭망과 보름이면 상방에 메를 지어 올렸던, 옥토끼와 계수나무에 관해 몽상했던, 이슬 내리는 밤에 곡식 여무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그 잃어버린 기억들이 시간의 주름 속에 숨어 있다. 한 인간에게서 이 무의식의 기억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억으로까지 연결된다. 그는 이 기억에 의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할 수 있다. 그는 묻혀 있는 기억의 역사 속에 있다. 설날에, 좀 더 넓게는 명절에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시간은 균일하게 분할된 시간 속에서 질이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기억이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시간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든다’는 의례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기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입고, 공식적인 삶과 내밀한 삶 사이에 깊은 단절을 겪었던 한국인들에게서는 국가가 만들어주려 하는 연례행사의 시간과 개인들의 무의식이 떠받드는 의례의 시간이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으며, 그것이 태양력 속에 공공연하게나 은밀하게 숨어 있는 태음력으로 상징된다고 해야겠다. 겉치레와 속생각 사이의 온갖 분열이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마다 자기 안에 의식되지 않은 자기를 또 하나 가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거기서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이면서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를 자기 안에 품고 산다. 이 자기 안의 타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의지를 훼방하지만, 많은 창조자들의 예에서 보듯이 때로는 의식과 의지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 타자가 이루어내기도 한다.

    황현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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