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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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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청록’과 포호삼법- 문저온(시인)

  • 기사입력 : 2017-11-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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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리대’ 때문이었다. ‘청록’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청록(靑鹿)은 푸른 사슴. 해방 후 최초의 창작시집이라는 ‘청록집’을 펴낸 청록파 세 사람 중 목월과 지훈의 대화로 연극은 펼쳐진다.

    무대는 두 사람이 거나하게 취하는 막걸리집. 탁자와 주인공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 공간적 배경이 그러한 것은 시간적 배경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 일제의 검열로 창작물이 훼손되고 시인은 불려가 취조를 당하는 이를테면 이런 상황이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외? 외? 이건 대일본제국을 폄하하는 말 아닌가? 조선놈들이 외를 왜라고 말하는 것 다 알아!”

    연극은 각박한 시절을 못 이겨 좌절하고 분노하는 두 사람에 집중한다. 중간쯤엔 술자리의 우스개 하나를 등장시키는데, 지훈의 입을 빌려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포호삼법(捕虎三法)이란 것이 있다. 호랑이 잡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 첫째, 어리석은 호랑이를 잡는 법은 호랑이가 잠잘 때 살그머니 가서 잘 드는 칼로 호랑이 얼굴을 열십자로 쫙 그려놓고 뒤로 돌아가 호랑이 꼬리를 잡고서 ‘이놈’하고 소리를 지르면 깜짝 놀라 깨어 후다닥 달아나는 바람에 알맹이만 쏙 빠져 달아나고 껍질은 제대로 남는다는 방법이다.

    그러나 범상한 호랑이를 잡는 데는 이 방법으로는 안 된다. (…) 진드기란 놈 스무 마리 정도만 잡아가지고 호랑이 자는 데를 찾아가서 호랑이란 놈 불알 근처에 놓아두면 된다. (…) 한창 시원한 고비에 이르면 그만 저도 모르게 꽉 하고 깨무는 통에 불알이 딱 끊기어 호랑이 입 속에 남게 되고 그래서 호랑이는 제풀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셋째 방법, (…) 영웅 호랑이는 사람 세상과 마찬가지로 지조를 지키느라 대개 아호(餓虎)가 많다. 이런 영웅 호랑이를 잡으려면 여자의 서답을 가지고 가야 한다. 영웅 호랑이가 자는 코앞에 이 서답을 던져두면 된다. 배가 고픈 영웅 호랑이는 무슨 피비린내를 맡고 눈을 뜬다. (…) 이윽고 영웅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일찍이 들으니 인간 여자의 하문(下門)에서 이런 것이 나온다더니 이게 바로 그건가 보구나. 내 아무리 배가 고픈들 이거야 먹을 수 있나.” 영웅 호랑이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분연히 자살하고 만다.(…)

    연극을 보던 나의 흐름이 끊긴 건 조지훈의 수필에 등장하는 저 ‘서답’을 무대의 지훈이 ‘생리대’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이 ‘서답’을 못 알아들어서 바꾼 거라고 했다. 그래도 당시를 무대에 올린 건데 ‘서답’이 낫지 않겠느냐고 관람후기를 전했으나, 나는 오랫동안 따로 마음이 불편했다. 영웅 호랑이는 분연히 자살하고 만다. 치욕감을 이용해 호랑이 사냥을 한다는 것인데, 생리대는, 여성의 하문(下門)은, 호랑이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능력(?)을 가졌구나. 우리에게 호랑이는 당연하게도 남성(!)이로구나. 우스개는 수컷 호랑이 판별법을 애초에 생략했으되, ‘조지훈훈하십니다’라는 대사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 연극무대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라는 저 절창과 부딪히며 객석에 앉은 나에게 모순을 떠안겼다. 나는 포호삼법의 마지막 대사에서 웃지 못했다. 당시의 세간에 떠돌던 우스개를 지금의 열린 의식으로 다시 우스개 삼을 수 있는 경지는 멀고도 어려울까.

    문저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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