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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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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창원에도 가야가 있었다- 김주용(창원대 박물관 학예실장)

  • 기사입력 : 2017-12-0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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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가야사 연구는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고성의 소가야가 그 중심이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창원지역에 대한 가야사 연구는 소외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창원은 ‘○○가야’라는 국명이 남아 있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탁순국, 골포국으로만 추정되었으며, 특히 가야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형 봉분을 가진 고분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관심 밖에 있었고 정부의 국정과제인 가야사 복원사업에 다른 지역보다 창원이 조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창원은 진정 가야사 연구에서 소외되어야만 하는가? 창원은 가야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다호리유적과 가야 발전의 원동력인 철 생산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성산패총 야철지가 있는 역사적인 도시다. 그리고 최근 발굴조사된 현동유적, 중동유적, 석동유적, 가음정동유적 등에서 고분뿐만 아니라 야철지와 패총, 주거지 등 가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생활유적이 다량 확인되었다.

    비록 대형 고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가야인의 삶이 녹아 있는 생활유적이야말로 가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형 고분에 치우친 기존 가야사 연구와 다른 창원만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가야사 복원사업을 계기로 미확인된 창원지역의 가야유적 기초자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른 가야지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합성동, 가음정동, 동읍, 진북 일원에는 그 세력을 인정할 만한 봉분이 있는 고분군이 있다.

    이들을 확인하여 현 상태를 점검하고, 일부 발굴을 통해 가야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아 시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학술대회, 전시회 등의 홍보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가야시대 창원이 남해안과 낙동강을 통한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연구 결과는 더 이상 창원의 가야사가 방치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정부의 가야사 복원사업을 그동안 소외되었던 창원의 가야사 연구의 중요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김주용 (창원대 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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