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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심야영화 (5) 살, 조작된 기억- 기억의 밤

  • 기사입력 : 2017-12-26 15: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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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시절 술 먹은 다음날에도 얼굴이 붓지 않아 종종 부러움을 샀다. 늦잠 자고 씻지도 않은 모습으로 강의실에 가도 '오늘따라 괜찮은데?'라는 말이 들려오곤 했다. 꾸미면 더 못 난 것은 함정. 아무튼 이 모든 것은 술과 늦잠에도 무너지지 않는 오똑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 덕분이었다. 그래서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누차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훗.

    그랬는데. 요즘 뭔가 이상하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나보고 '살 찐 것 같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 '살 쪘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보니,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해, '부어'보일 뿐이라고 강력 주장했다. 하지만 누차 이 같은 소리를 듣다보니, 내가 살 찐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먼저 말한다. 살 쪘습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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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된 살쪘다는 말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성난 두꺼비마냥 턱살은 부풀어 있다. 볼살과 눈두덩이는 덤이다. 복부는 아나콘다 한 마리가 휘감고 있다. 어떤 날 빨래를 잘못해서 인지 바지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냄새를 맡기 위해 무릎을 코에 갖다대려는데 다리가 잘 올라오지 않아 깜짝 놀랐다. 목욕탕에서 체중계 위에 올라갔다가 두 눈을 의심키도 했다. 몸무게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정확한 수치는 비밀이다.

    후회가 휘몰아쳤다. 맨날 고기, 고기 하는 게 아니었는데. 누드빼빼로를 한 번에 5개씩 먹는 게 아니었는데. 둘이 식당 가서 음식을 3~4개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실의에 빠진 이때 '기억의 밤'이라는 영화를 봤다. 실의는 실의고 일은 일! 독자들과의 약속은 지켜야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무열(형 유석 역)과 강하늘(동생 진석 역)이 사이좋게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집에 짜파게티 있는데... 그냥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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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대해 곧바로 스포하자면, 강하늘은 김무열의 친동생이 아니다. 강하늘은 과거 김무열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범이다. 하지만 강하늘은 살인에 대한 충격으로 당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다. 겨우 살인범을 찾았더니 자기한 일도 기억 못하는 것에 분개한 김무열은 강하늘에게 최면을 건다. 제대로 벌주기 위해. 김무열 일당은 강하늘이 기억을 잃기 전의 시기로 되돌려 놓고, 연극을 펼친다. 이 때문에 2017년에 사는 40대 강하늘은 자신이 1997년 20대 재수생인 줄로 안다. 김무열 일당은 달력을 바꾸고, 당시 신문을 가져다 놓는 등 강하늘의 주변 환경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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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날, 김무열이 납치됐다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온 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강하늘은 김무열의 뒤를 쫓게 된다. 그러다 김무열 일당에게 쫓기게 된 강하늘은 추적을 피해 파출소에 들어오게 되고, 자신이 2017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거울에 비친 강하늘은 촉촉한 꿀피부의 20대가 아닌, 칙칙한 피부색에 짙은 다크서클과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한다. 최면 밖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난 반전을 곱씹으며 집으로 오는 길. 나는 혹시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내가 홀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살이 찌긴 했지만, 그렇게 심하진 않은 것 같은데. 주변에서 하도 말하니까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집에서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샤워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얼굴부터 발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흠. 생각보다 최면이 깊게 걸린 것 같다. 살이 그대로다. 그렇게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나는 계속 살 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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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만해라이...(부들부들).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 죄송합니다. 살 안 찐 걸로 믿고 싶었습니다. 실은 조금 더 나았던 과거에 사로잡혀서, 현재를 조작해 왔던 건 아니었나 싶네요. 새해를 기다리며 올해의 기억을 마무리하다 든 생각이었습니다. 내년에는 살을 빼는 걸로.

    곧 해피뉴이얼!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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