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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하여- 김상군(변호사)

  • 기사입력 : 2017-12-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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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를 하였던지 몸살기가 있어 병원에 들렀다. 병원에서 주는 처방전을 손에 쥐고 병원 1층에 있는 약국에 갔다. 추위가 뼈 속을 파고들어 잔뜩 움츠린 채로 얼마간 기다렸다. 내 이름을 불러 약을 받으러 계산대로 갔다. 약사가 “아버님. 이 약 처음 드세요?”라고 묻는다. ‘아버님이라니, 설마 나를 부르는 것인가?’ 나도 몰래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나는 좋든 싫든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약봉지에는 내 나이가 정확히 인쇄돼 있고,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저씨의 모습이니, ‘아버님’이라고 불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 또 실제로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홍길동도 아닌 약사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억울한 마음이 든다. ‘아버님’이라고 나를 부르는 그 약사가 나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마음은 대학생 시절이랑 별 차이가 없는데, 여전히 나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데, 고작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을 뿐인데, 조금만 더 지나면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 받는 날이 오게 될 것인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에 다가가는 일이다. 죽음이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을, 막연한 먼 일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가까운 일이라고 느끼는 순간, 사람의 인식은 확장된다. 자신이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구도 전혀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은 우리의 인식을 자연과 우주와 신에게 이르는 문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요구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자각은 인적인 네트워크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시간과 체력을 희생하면서 인간관계를 넓혀 왔다면, 이제는 소수의 친근한 사람들, 특히 가족과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폭을 줄이는 대신 깊이에 치중하는 것이다.

    돌이켜 본다. 내키지 않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던 것은 내가 원해서였다기보다, 내가 하고 있는 생업에 도움이 될까봐, 내가 얻을 수 있는 명예에 다가갈 수 있을까봐, 나중에라도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연장할 수 있을까봐 억지로 이어왔던 것일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네트워크를 단절함으로써 그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은 자연스럽다. 미움을 받을 용기는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생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나중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연기(延期)할 필요는 없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들은 나이가 들면서 하나하나씩 천천히 눈에 들어오고,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다. 여행을 가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빠져들고, 스마트폰 게임을 멈추지 않지만, 어른들은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눈길을 주고 그 아름다움에 가슴 시린다. 이는 나이가 주는 선물이다. 광활한 자연을 보면서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는, 약간의 슬픔과 회한이 섞이는 애틋한 감정 바로 그것.

    2017년이 저물어 간다. 정작 중요하고 정작 소중한 사람과 일에 집중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한 살을 더 먹기까지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이자 선물이 된다. 우리가 1년 단위로 세상을 사는 것은 참으로 잘 고안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 “나쁘기만 한 것이 없고, 좋기만 한 것도 없다”는 것.

    김상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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