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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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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당신의 시간- 정정화(소설가)

  • 기사입력 : 2017-12-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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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을 며칠 남겨둔 한 해의 끝자락, 이맘때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다. 해마다 새해에는 촘촘히 계획을 짜서 적어두고 좀 더 나은 시간을 보내겠노라고 다짐하곤 한다. 이즈음이 되면 후회할 일이 있게 마련이다. 예기치 못한 복병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비한 시간은 더 아쉽게 다가온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갈 뿐인데도.

    얼마 전 경주의 한 왕릉을 찾았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찬바람에 살갗이 시려 왔다. 안내소를 지나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상이 보이는 입구에 들어서자 도래솔에 둘러싸여 햇살을 받은 왕릉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능을 보호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는데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어떤 재난도 피해갈 것 같은 고요한 아름다움이었다. 왕릉을 한 바퀴 돌아 소나무 가까이 다가가니 구불텅한 소나무 줄기 위로 솔잎의 떨림이 느껴졌다. 푸른 하늘에 수천수만의 솔잎이 낱낱이 바람에 떠는 모습, 코끝에 실려 오는 솔향, 봉분 위로 쏟아지는 황금색 빛줄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청량감이라 해야 할까. 순백의 공간에서 그동안 일상에서 쌓인 먼지가,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역사 속의 왕과 신하가 전통복장을 갖추고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고즈넉한 왕릉 앞에 서면 시간이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천 년 전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어느덧 숙연해진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간은 천 년 후쯤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물건들이 하루하루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대인의 문명에는 어떤 중요한 것이 남아서 후세에게 전해질지 새삼 궁금해진다. 즐거운 상상이 덧붙여진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듯 우쭐해졌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바람이 전하는 솔향에 한참을 머물다 돌아나가는 길. 아쉬움에 머뭇거리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히 곁에 두기 어려운 게 우리네 삶이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들어선 한 노인이 다리를 절룩이며 석상 앞에 다가가더니 “내 청춘 어디 갔노?”라고 했다. 노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헝클어진 은발, 깊게 팬 주름, 허술한 옷차림의 노인이 추워 보였다. 엄마가 된 후 아이들이 자라는 것만 보다가 가끔 자신의 나이를 알아챌 때면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바람을 맞으며 왕릉으로 걸어 들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한평생이 되듯이 살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감정에 얽매여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무리를 하거나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가끔 자신을 돌아보며 잘 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순간이 모여 삶 전체가 된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듯싶다.

    연말 즈음엔 시간의 흐름에 더 민감해진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매달리거나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다 보면 불행해진다. 지금 내가 하는 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 나와 함께하는 동시대인에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순환되는 삶 속에서 지금, 여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소중한 것을 하나하나 느끼며 살아갈 일이다.

    정정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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