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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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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등을 돌려보면- 김현숙

  • 기사입력 : 2018-01-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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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섰을 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몸을 돌리든, 마음을 돌이키든 한 번쯤은 앞을 향하고 있는 내 구둣발을 뒤쪽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일부러라도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길을 가다 몸을 돌리면 내가 지나온 길에 저런 것들이 있었나 싶게 풍경이 생경해진다. 다르게 보인다.

    스치고 지나온 가로수가, 옆구리만 보였던 지하도 입구가, 팔을 벌리고 입을 벌린 채 정면으로 펼쳐진다. 뒤따라오는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일이 서로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기적어기적 뒷걸음치는 내 모습을 보며 웃어주는 상대가 있어 그리 무안하지만은 않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우리는 뒷걸음을 두려워한다. 몸을 뒤로 돌리면, 순간 균형 감각이 깨지고 리듬마저 흐트러져 겁부터 먹는 것이다. 줄곧 지탱해온 자신만의 방향을 잃으면서까지 왜 굳이 뒷걸음을 쳐야 해. 의문부터 들 것이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는 일에 선뜻 자기를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오늘도 앞만 보고 길을 간다. 자신이 타인의 시야를 가리는 줄도 모른 채 가고 있다.

    앞서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등을 보이며 걷고 있다. 그 많은 등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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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러멘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상상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짐작하면서 나는 앞에 선 젊은 남자를 보고 있다. 앞만 보고 걷는 남자의 두 눈과 코, 입술을 떠올려보는 일은 속마음을 헤아려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뒤에 오고 있는 아주머니도 내 어깨에 걸린 핸드백 속이 궁금할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내 왼손을 쳐다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뒤따라오는 사람을 의식하게 된다. 그럴 때면 차라리 몸을 돌려 내 앞면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너나없이 이렇게 길을 가고 있다.

    앞만 보며 가는 일이 외로운 까닭은 늘 누군가의 등을 보며 가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제비도 꽁무니를 보이고, 도로 위의 자동차들도 뒤 범퍼를 보인다. 나는 앞모습을 보여주며 가는 선두(先頭)를 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가 그랬고, 스승이 될 만한 분도, 선배라는 사람들도, 모두가 그들 등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무늬’를 좇게 했다. 표정 없는 뒷모습에서 메시지를 찾는 일은 고독했다. 한 번쯤 얼굴이라도 돌려 웃어줬다면 뒤따라가는 내가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앞서간다는 것은 자신의 전면을 드러내면 안 되는 일인가 보다.

    한 아이가 은행잎을 밟으며 내 앞을 가고 있다. 아까부터 아빠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있었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빠가, 위험해 넘어진단 말이다 하면서 말리고 있었다. 결국에 손을 빼낸 아이가 두 팔을 흔들며 춤을 추듯 까불었다. 자유롭다는 표시로 느껴졌다. 그 아이 발걸음이 이쪽저쪽 제 마음대로 스케이트를 탔다.

    똑바로 앞만 응시하고 걷던 엄마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의 따듯한 시선에 마음이 놓였는지, 고 작은 몸통을 뒤로 획 돌리더니 갑자기 뒷걸음질을 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 따라 해봐요.’하는 눈빛으로 뽐을 내며 웃었다. 예뻤다. 바닥에 깔린 은행잎을 발바닥으로 비벼가며 미끄러지듯이 가고 있다. 불안한 기색도, 두려운 마음도 하나 없는 편안한 뒷걸음으로 가고 있다. 그때 아이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빠 손을 다시 꼭 잡고 있었다.

    같은 길을 가면서 오늘 유일하게 앞모습을 보여준 아이, 겁이 나서 어기적대며 뒷걸음치던 내게 선명한 메시지를 선물해줬다. 아이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였다. 힘을 빼고 미끄러지듯 가라고 했으며, 무서우면 옆 사람 손을 잡으라고 했다. 자기처럼 말이다. 뒤돌아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지만, 나는 그 아이처럼 하지 못했다.

    앞모습과 뒷모습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한 몸이나 다름없는 그 차이를 반으로 나눌 분간이 있긴 한 걸까. 그래서 우리는 애매해하나 보다. 과연 내가 가는 이 길이 앞쪽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왜 죄다 뒷모습만 보이며 간단 말인가. 어쩌다 역방향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은, 그럼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역행하고 있다는 말일까. 모호했다. 어찌 보면 돌아보는 그 자체가 앞일지도 모르겠다.

    지난겨울, 죽음이 만들어준 조우(遭遇)가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아이들이 웃고, 문상객들의 술잔이 오고갔다. 그날 아버지는 영정사진 속에서 우리와 마주하고 계셨다. 살아생전 등만 보이며 사셨던 아버지가 오늘에서야 몸을 돌려 나를 보셨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너무 늦게 돌아봐서 미안타 하는 것 같았다. 당신 가시는 그 길이 한 번 가면 돌이킬 수 없는 길임을 아셨을까. 가는 마당까지 뒷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뜻이 아니게 영정(影幀)으로 뒤돌아 앉으셨지만, 이 세상이 그저 슬픔 일색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아버지 보세요. 엄마는 친지들 품에 안겨 위로받고 계셔요, 현관에 신발들은 어질러질 틈 없이 정리되어 있고요. 또 천장에 형광등도 환하게 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늦게 돌이켜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그만 넣어두세요.” 죽음이 돌이킨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회한의 덧없음을 읽었다.

    비단 아버지뿐일까. 영정사진 안에 고인은 누구 할 것 없이 나, 너, 우리와 마주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떠나고 없는 세상이 궁금해서 돌아섰을 수도 있고 이승에 미련이 남아 몸을 돌이켰을 수도 있다. 허나 다른 것 다 제쳐놓고 그동안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한 스스로에게 미안해서 본연의 모습 하나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영정이지만 당신과 내가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해마다 영정사진을 찍어서 ‘자신이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본다는 배우가 있다. 매일매일 조금씩 ‘죽음’으로 가고 있는 스스로를 돌려세워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 그녀가 전하고 싶은 말 또한 같은 선상이 아닐까 싶다.

    돌아섰을 때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갑작스레 혜안(慧眼)이 생겨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보폭을 줄이고 걸음 속도도 늦춘다. 그 걸음 값에 맞춰 마음 또한 같은 값으로 따라오므로, 우리는 그전보다 세상을 좀 더 찬찬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한 번쯤 등을 돌려 뒤따라오는 바람을 맞자. 옆에 있는 사람 그 누구라도 좋으니, 겁나면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달라고 해보자. 등을 돌려 뒤를 보면 보이지 않았던 앞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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