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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7) 통영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화가 이중섭 절정을 그리다

  • 기사입력 : 2018-01-0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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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색 바탕에 거칠고 대담한 필치로 그려진 한 마리의 황소. 살짝 비튼 고개와 벌어진 입, 형형한 눈빛이 화면을 뚫고 나올 만큼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꼽히는 이중섭의 ‘황소’는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만큼은 알 정도다. 하지만 이 역작이 통영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중섭은 6·25전쟁 발발 후 피란길에 오르며 전국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1950년 12월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란민 수용소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는 제주 서귀포, 다시 부산을 거쳐 1952년 봄 통영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통영에서 약 2년간 머물며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미술사에 길이 남게 될 작품들을 대거 쏟아낸다.

    통영시 항남동 242, 옛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가 바로 이중섭이 통영 거주시절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파란색 지붕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건물 앞에는 이중섭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서까래나 기둥같은 건물의 뼈대는 나무를 사용하고 지붕은 기와를 얹은 2층 구조의 건물로 지금도 건축 당시의 외관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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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화가가 작품활동을 했던 통영의 옛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성승건 기자/



    이 건물의 최초 건축 시기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로 알려져 있다. 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건물이 있던 일대가 기생집인 청루(靑樓)가 많아 ‘청노골목’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51년 경남도가 문화동 세병관 앞에 나전칠기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학원인 도립나전칠기강습소를 설립했고 1952년 강습소가 이 건물로 옮겨지면서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로 명칭을 바꾼 후 본격적으로 나전칠기 장인들을 길러내게 된다.

    1952년 당시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주임강사로 있던 유강렬이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주인공이었다. 이중섭과 동향(同鄕)인 유강렬은 염색공예 전문가로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설립을 주도했으며 훗날 국립중앙박물관 과장과 부설 연구소 주임, 홍익대학교 공예학부 교수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유강렬의 도움으로 통영에 머물 곳을 얻은 이중섭은 정식강사는 아니었지만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자주 나와 학생들을 가르쳐주곤 했다. 당시 양성소는 공예 기술과 함께 도안 등 미술 기본기를 가르쳤는데 그는 도안 스케치를 봐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자신의 그림도 그렸다. ‘황소’는 그가 통영에서 그린 소 연작 중 첫 작품인데 그의 첫 거처가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였던 점으로 미뤄 이곳에서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영옻칠미술관 설립자인 김성수 화백이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1기로 이중섭이 머물던 시절 수학하던 학생이었다. 당시 양성소는 유강렬, 이중섭을 비롯해 훗날 나전칠기 장인이 될 재목들이 대거 수학하던 예술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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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 벽에 이중섭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통영에는 유강렬 외에도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았다. 통영 출신의 서양화가 김용주, 당시 통영(충무)시장이던 김기섭 등이 그를 물심양면 후원했다. 김용주는 이중섭과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었는데 환경이 상당히 부유했던 편이라 그에게 음식이나 화구 등을 건네주곤 했다. 김용주의 제자였던 화가 박종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산양면 농가에 거주하고 있던 김용주는 부인에게 부탁해 이중섭에게 된장, 간장, 김치 등 반찬을 해서 보냈는데 이중섭이 통영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농가에서 통영 시내까지 반찬을 들고 다니기 무거워 소 달구지에 쌀과 부식을 실어 날라다 주었다고 한다. 김기섭 시장도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예술인을 많이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기섭은 이중섭이 1953년 통영 성림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중섭은 통영을 떠날 때 그의 대표작 ‘흰소’를 김기섭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전해진다.

    통영 거주 시절은 이중섭 화업(畵業)의 절정기였다. 통영 향토사 연구자들은 통영에서 이중섭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생활환경을 꼽는다. 김용주, 김기섭뿐만 아니라 당시 그와 교류했던 유치환, 전혁림, 박생광 등 다른 예술인들도 그에게 조금씩 도움을 줬다. 숙식을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으니 통영에 오기 직전 부산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에 비하면 그림에 집중하기가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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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이 첫 개인전을 열었던 성림다방으로 추정되는 건물.



    그는 통영에 머물며 ‘황소’, ‘흰소’, ‘가족’, ‘도원’, ‘달과 까마귀’ 등 자신의 대표작을 포함해 통영을 소재로 한 다수의 풍경화를 완성한다. 세병관, 충렬사, 통영 앞바다,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선착장(강구안)을 내려다본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 20여점이다. 풍경화는 즐겨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였지만 통영은 예외였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곳, 푸른 바다를 낀 항구 마을의 풍경은 그의 가슴속에 깊이 남았을 터다.

    그림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이중섭은 가난했던 형편 탓에 경조사가 있는 경우 돈 대신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고 한다. 시조시인이던 초정 김상옥 선생의 출판기념회에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관비를 그림으로 대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1954년 봄 통영을 떠나기 전까지 유화를 포함해 은지화도 수십 점을 그렸다. 챙길 것이 많아 그림을 많이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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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이 화가로서 최고의 시절을 보냈던 통영에는 안타깝게도 그의 흔적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외에 그가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동양여관과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열었던 호심다방은 예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가 유치환과 자주 찾았다던 복자네 선술집도, 다다미방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할머니께 혼이 났다는 또 다른 단골 술집인 샘이집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성림다방 건물이 그나마 예전의 외관을 조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도 1975년 민간 소유가 된 이후 오랫동안 상업시설로 쓰여온 탓에 내부에는 예전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기둥과 서까래가 오랜 시간을 변함없이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되지만 이 건물도 언제 어디에 매각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통영시는 건물 보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첫 개인전의 환희, 따뜻했던 예술인 친구들의 손길, 그들과 단골 술집을 누비며 나눴던 끝없는 대화. 이중섭이 통영에서 남겼던 예술적 체취는 깊고도 짙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그의 체취는 너무나 희미하고도 옅었다. 따라가려 해도 중간에 끊어져버렸고 그 희미한 체취마저 언젠가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못내 서글퍼졌다. 그가 통영을 사랑했던 것처럼 통영도 그를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통영에 머물렀던 2년이라는 시간이 짝사랑으로 기록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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