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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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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최윤덕 장상(將相)- 김재명(창원시 문화유산육성과장)

  • 기사입력 : 2018-01-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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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청 옆 창원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중심지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최윤덕 장군 동상이다. 이 동상을 보고 창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기계공업도시로 조성된 신생도시인데 웬 동상이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향토사학자 박동백 전 창원대 교수가 펴낸 ‘최윤덕 장상’을 참고해 이 동상이 왜 창원 중심지에 서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창원이라는 지명의 역사성을 살펴보자. 1980년 4월 1일에 개청한 창원시는 과거 유구한 역사상의 옛 이름을 다시 찾은 것에 불과하다. 즉 창원이라는 명칭이 우리나라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8년(1408년) 때의 일이다. 당시 의창현의 ‘창’자와 회원현의 ‘원’자를 합하여 ‘창원’이라 불렀다. 이 명칭은 1910년 일제강점기의 ‘마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500년 이상 사용된 우리 지역의 본래 지명이다.

    최윤덕은 고려조 1376년 의창구 북면 내곡리에서 태어났다. 1410년 무과에 급제했고, 세종 1년 때인 1419년에는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고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세종 15년 때인 1433년에는 여진족을 대파한 파저강 작전 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변방 여진족 무리들이 다시 침범하자 우의정의 신분에 있으면서도 직접 전장에 나가 이들을 진압했기에 출장입상(出將入相), 즉 나가면 장수요 들어오면 정승이라 장상(將相)이라 했다.

    우리나라 국경선이 오늘날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정해진 때가 조선 세종 때의 일이고 압록강 유역의 4군(여연, 자성, 무창, 우예)을 개척하여 온전한 우리 땅으로 확정지은 인물이 바로 최윤덕이다. 문치를 중시했던 조선조에서, 더욱이 인물이 넘쳐나는 세종 때 무관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그분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세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호를 ‘정렬(貞烈)’이라 하였다.

    우리 창원에 이처럼 훌륭한 선조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최윤덕 장군의 동상을 보면서 나라사랑·지역사랑 정신을 다시 일깨워 본다.

    김재명 (창원시 문화유산육성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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