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가고파] 딸 가진 엄마- 강지현 편집부 차장

  • 기사입력 : 2018-01-09 07:00:00
  •   

  • ‘어메는 나를 낳고 “또 딸이네.”/ 윗목에 밀어 두고 울었다/ 나마저 너를 미워하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겠지/ 질긴 숨 붙어 있는 핏덩이 같은/ 나를 안아 들고 또 울었다/ 하늘에서는 흰 눈송이가/ 하얀 이불솜처럼 지붕을 감싸던 날이었다’ 전남 곡성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안기임 할머니의 ‘어쩌다 세상에 와서’라는 시다.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 일흔 넘어 깨친 한글로 정성껏 지은 시에는 딸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애잔하게 녹아 있다.

    ▼세월이 유독 여자에게 모질었던 그 시절, 엄마는 딸을 낳고 울었다. 딸 낳은 설움은 딸로 태어났던 자신에 대한 설움이자 여자로 살아온 세월에 대한 설움이었다. 엄숙한 가부장문화와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했던 그때, 연이어 태어난 딸자식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아들 많은 건 자랑이었지만, 딸 많은 건 흉이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지금은 교과서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지만, 그땐 그랬다.

    ▼요즘 딸 많은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젊은 부부들은 오히려 여아를 선호한다. 뱃속 아이가 아들인 걸 알고 실망스러워 울었다는 임신부, 둘째도 아들일까 봐 낳기 무섭다는 아들엄마도 있다. 딸 둘은 금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는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차별의 벽과 유리천장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사회풍조는 바뀌었지만 세상은 더 무서워졌다. 최근 창원 50대 회사원이 같은 동네 사는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사건이 알려지며 큰 파문이 일었다. 피해자는 이제 겨우 여섯 살.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안긴 그가 한다는 말은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 어이없는 변명뿐이었다.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의 77%는 ‘아는 사람’이었다. 이웃집 아저씨, 친척 오빠, 직장 동료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어메는 나를 낳고 울었다/ “딸이네”/ 나마저 너를 지켜주지 못하면/ 세상이 너를 삼키겠지/ 나를 안아 들고/ 어메는 또 울었다’ 안 할머니의 시가 다르게 읽히는 요즘이다.

    강지현 편집부 차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강지현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