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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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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물고기와 춤을- 유희선(시인)

  • 기사입력 : 2018-01-1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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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한 한낮, 거실에는 물고기들만이 움직이고 있다. 낮은 볼륨으로 틀어놓은 클래식 음악 같다. 한 공간에서 최대한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소극적인 모양새가 마치 식물 같다. 15년간 키우던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난 뒤, 다시는 집안에서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건만 결국 물고기로 타협을 보게 된 것도 그런 만만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려견과의 15년은 한 해 한 해가 달랐다. 사람과 동물 간의 거리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절감케 됐다.

    반면 물고기는 철저하게 다른 세상에서 온 그 무엇이었다.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마냥 흘러가는 음표처럼 따라 부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인내심으로 귀 기울이고, 애정 어린 관심을 쏟아야만 얼핏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물고기와 왜 그토록 소통하려 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물고기가 자꾸 죽었기 때문인 것 같다. 보살피는 데 많은 열을 올리면서 그쪽 세상이 더 궁금했다. 어항 앞에 붙들려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그들의 세계를 깊게 체험했다. 한 세계와의 진정한 만남은 또 다른 닫힌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니까 나의 물고기 이야기는 물고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통하기 힘든 것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물고기는 보채지도 안달하지도 않는다. 방치하면 그저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는 모빌과 다름없다. 생명은 사물이 되어버릴 뿐이다. 나와 신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내가 물고기 입장이면 수면 밖의 세상은, 인간과 신의 관계처럼 혼돈 그 자체일 것이다. 답은 쉽게 오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과 상상은 침묵만이 가득한 이쪽과 저쪽 세계 사이로 무궁무진한 사색의 길을 내어줬다. 닫혀 있던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현실을 초월하고 확장하는 충만함을 주는 반면에 서로의 영역에 대한 지극한 존중과 예의가 필요한 일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제 나에겐 여섯 개의 어항에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다. 아름다운 꼬리로 플라멩코 춤을 추며 구애하는 수컷의 현란한 몸짓에 나는 알 수 없는 평화를 느낀다.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이종(異種)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시인의 한 역할이기도 하지만 궁극은 모든 개인의 자아발견과 올바르게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한동일 신부의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글로 써내는 과제로 강의는 시작된다. 그 공부의 끝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로 요약된다. 그는 겸손하게 우뚝 선 나무 같다. 언어에 대한 호기심은 라틴어 바다에 빠지는 운명을 만들었고, 수많은 고비와 경계에서 겪었던 체험과 지혜는 ‘라틴어 수업’이라는 또 다른 결실을 맺게 됐다. 실제로 그는 우리나라에 마에스트로를 100명 정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도 말한다.

    겨울방학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방학을 보냈을까?

    어쩌면 많은 체험보다 필요한 것은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당연하다고 여겨진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질문 하나가 더욱 값진 것일 수 있다. 상영 중인 영화 ‘코코’는 그런 면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보여 주는 감동적인 영화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문 앞에서도 아이들이 서슴없이 노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희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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