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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 김재명(창원시 문화유산육성과장)

  • 기사입력 : 2018-01-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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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호부는 고려·조선시대에 두었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도호부와 도호부를 두었는데 대도호부는 전국에 걸쳐 다섯 곳만 두었다. 창원을 비롯하여 안동, 강릉, 영흥, 영변이다.

    왜 다섯 곳만 두었을까? 특별한 까닭이 있나 싶어 역사를 살펴 보았지만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창원은 다르다. 조선왕조는 1392년에 개창하여 무려 200년 동안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중국 제나라 명장 사마양저는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했는데 그간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전쟁 대비로 전환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단 보름 만에 한양도성이 점령당할 즈음 궂은비 내리는 심야에 선조는 몽진을 떠난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왜군의 화력 앞에 모든 벼슬아치들이 맡은 지역을 버리고 왜구가 없는 곳으로 피신할 때 오로지 한 분,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만은 자기 지역을 떠나 왜군들이 횡행하는 경상도 바다로 진군했고, 충무공 최초의 승첩인 옥포해전은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을 북돋워 주었다.

    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 왜군들이 창원·함안 일원에 주둔하면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서는 창원성을 우선 점령해야 했기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창원부사 김응서를 중심으로 한 벼슬아치나 백성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단 한 사람도 항복한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창원부민의 호국정신을 알게 된 체찰사(조선시대 난리가 났을 때 그 지방에 내려가 군무를 총찰하던 벼슬) 이원익 공이 선조에게 장계를 올린다. 이에 선조는 그 장한 뜻을 높이 평가하여 1601년 창원도호부를 창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킨다.

    창원대도호부는 1661년 현종 때 문묘의 전패를 분실한 사건을 계기로 9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어 1895년까지 존속한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분연히 항전한 호국정신의 으뜸 고장이 창원이다.

    김재명 (창원시 문화유산육성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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