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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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9) 마산 성요셉 성당

믿음으로 쌓아 올려 안식과 위로를 구하다
1900년 프랑스 신부가 마련한
마산 완월동 자락 집 한 채

  • 기사입력 : 2018-02-0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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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땐 성요셉 성당을 ‘돌 성당’이라고 불렀어요. 그 당시만 해도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돌 성당 종탑에서 종을 치면 중리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해요. 시계가 귀할 때니 종소리로 새벽이 왔구나 했죠.”

    1945년 유아세례를 받은 후 지금까지 완월 성당을 다니는 윤영환씨(74)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성요셉 성당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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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지여고 내 마산 성요셉 성당./성승건 기자/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성요셉 성당(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완월동 교회 100년 자료집’에 따르면 이곳은 1898년 1월 한국 땅을 밟은 프랑스 신부 에밀 타케(한국명 엄택기)가 초가삼간으로 만든 임시성당을 세워 선교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1898년 당시 경남에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관찰사가 거주하는 진주에서 장소를 물색하던 에밀 신부는 술집과 기생집이 많아 성당을 세우기 마땅치 않자 고민에 빠졌다. 그는 1989년 마산항 개항에 맞춰 마산에 본당을 짓기로 결심한다. 마산포는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적어 천주교 선교에 이점이 많았을 것이다. 에밀 신부는 임시로 조선인들이 많은 현 오동동 고려호텔 인근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공소로 사용했다. 그는 임시 거처로 조선인 마을에 작은 집을 구입하려다 일본인들의 유입으로 집값이 뛰자 완월동 자락에 헛간이 붙은 다섯 칸 본채와 세 칸짜리 집 한 채를 마련해 1900년 6월 29일 마산포 성당(현 성요셉 성당)을 설립했다. 당시 ‘범골’은 몇 채의 가옥만 휑하니 있을 뿐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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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문제만 주교 방문 기념사진.



    이후 1914년 이곳에 온 4대 주임 줄리베르몽(한국명 목세영) 신부가 1928년에 성당 축조 경험이 없는 조선인 대신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지었다고 한다. 길이 21.5m에 너비 8.76m 규모의 장방형 평면의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식의 건축양식을 절충해 화강암과 목조로 만들었다. 정방형에 가깝게 다듬은 화강석을 여러 단으로 쌓아 외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목조 트러스를 올린 다음 골함석판을 덮어 모임지붕을 완성했다. 돌 성당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시 한 편에서 찾을 수 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더라고/돌을 자르고 나르고/쌓아 올리렵니다(중략)/당신의 역사에 중국인 기술자도 힘을 보탰습니다/영차 소리 들릴 때마다 당신의 집은/무학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그 소리 끝없이 이어져/종탑에서 범골로 메아리치는/당신의 온화한 소리가 중리 들녘까지 퍼져 나갈 때/(하략) -민창홍 시인 ‘마산 성요셉 성당’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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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고 김수환 초대 마산교구장 성성식.



    민창홍 시인은 재직 중인 마산성지여중의 울타리 안에 있는 성당과 같은 이름으로 시집을 펴냈다. 민 시인은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역사이고 마산의 역사이며, 마산교구의 역사인 성요셉 성당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완월 성당에 다니는 신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설립 당시를 묘사해 시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돌을 자르고 나르고’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신도들의 신심(信心)으로 지어졌다. 현장에서 통석을 손질한 탓에 돌들은 균일함 대신 울퉁불퉁한 모양을 띠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한 돌을 운반한 것이 아니라 원석을 가져와서 40㎝ 정도의 육면체로 일일이 손으로 제작해 공이 많이 들어갔다. 그 모양이 허투루 보이거나 투박하지 않고 멋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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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나란히 미사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



    건물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야 외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회색빛 교회당 양 끝엔 크지 않은 십자가가 달려 있고 정면 벽 중앙 상부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8개 꽃잎을 가진 장미창이 자리하고 있다. 박공지붕 위엔 십자가와 프랑스에서 건너온 청동제로 만든 종이 매달려 있다. 이 종은 완월 성당을 지은 후 옮겨갔다가 완월 성당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한 2000년에 성요셉 성당으로 자리를 되찾았다. 외벽에 낸 창은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세장한 장방형으로 만들었으며, 창 주위에만 세장한 아치형으로 돌을 쌓아 간략 단순한 외관에 약간의 변화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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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성요셉 성당 내부 모습.



    1928년 4월에 이전의 마산포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지금의 석조 성당을 착공해 1931년 6월 1일에 성당과 제대의 공사를 마쳤다. 2004년께 창문과 지붕을 양철에서 동판으로 바꾸고 마룻바닥과 지붕, 창호, 출입문 등을 교체하는 등 축조 이후 몇 차례 수리를 했지만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경남지역 가톨릭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한국 근대 건축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주 찾는단다.

    나무색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비범한 성스러움이 감돈다. 윤씨는 성당 의자에 앉아 미사를 보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예전엔 신부님이 신도와 등지고 미사를 집전했고, 신도들은 라틴어로 미사를 지냈어요. 그러다가 1962년께 바티칸 공의회에서 각국의 언어로 미사를 집전하라는 결정을 하게 돼 그때 성요셉 성당이 제일 먼저 그 결정을 따랐죠”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곳은 최근에 지어진 성당에는 없는 십자가와 나란히 미사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가 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일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성성식(成聖式)을 꼽았다. 1966년 5월 31일 열린 주교 서품식·교구장 착좌식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돼 많은 신도들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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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인드글라스.



    양쪽에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불리는 14개의 조형물이 벽마다 7개씩 걸려 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성가 책이 눈에 띄는데, 성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성직자들은 교육에 뛰어든다. 성요셉 성당의 2대 주임이었던 제르만 무쎄(한국명 문제만) 신부가 1910년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성지학교를 세우고 한글을 배우고 싶은 이는 누구나 올 수 있게 했다. 점점 신도가 느는 데 공간이 좁고 위치가 산 중턱에 있어 접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1975년 ‘완월 성당’에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넘겨 주게 된다.

    외로운 처지가 될 뻔한 이 성당은 2000년에 경상남도로부터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며 예술적,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은 주로 학교 명상실로 이용되거나 한 달에 한 번씩 학생들을 위한 미사 공간으로 이용된다. 또 주교 착좌식 등 마산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여전히 간간이 열리며 그 쓰임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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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공허하거나 까닭 없이 무료할 때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이 공간을 추천한다. 단, 이곳을 찾을 때는 방문증을 작성해야 하는데 학교 안에 있는 건물인 만큼 학생들의 학업에 방해되지 않는 시간에 찾아야 한다.

    윤씨는 “6·25전쟁 이후에 새벽마다 성당에 다녔어요. 종소리가 들리면 놀다가도 멈춰 기도를 올리기도 했고요.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곳은 칠흑같이 어둡던 그 시절 실낱같은 희망을 피우게 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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