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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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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본지 ‘유치준씨 취재자료’, 증거 채택돼야

  • 기사입력 : 2018-03-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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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마민주항쟁 과정에서 사망한 고 유치준씨에 대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고 유치준씨는 당시 옛 마산시 새한자동차 앞 도로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에서는 그동안 자체조사 결과 고인이 경찰 폭행으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본지의 취재자료가 뒷받침이 됐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진상 보고서는 부마민주항쟁과 관련이 없거나 이를 인정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고 했다. 고인의 신원과 관련해서도 ‘행려사망자’로 단정했다. 위원회가 2014년 출범할 때부터 편파적인 인적 구성과 비전문성으로 부실 우려가 컸지만 부마민주항쟁 관련단체들로선 피를 토할 일이다.

    본지 창간 72주년을 맞아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남부희 창원대 사학과 겸임교수(전 경남신문 상무이사)와 가진 인터뷰를 보면 위원회의 진상보고서가 진상은폐보고서란 비난을 받아도 싸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남 교수의 증언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취재자료에는 옛 새한자동차 앞에 50대로 보이는 노동자풍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고 마산경찰서와 마산시청, 경남도청 등의 사망발생 보고서는 타살체가 분명하다고 기록돼 있다. 암울했던 시기, 이 자료는 1989년이 돼서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도 위원회는 증거 타령만 했다고 하니 분노가 치민다. 고 유치준씨가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도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왜 임의로 사체부검을 했는지 밝혀야 하는 것은 조사의 기본이 아닌가.

    남 교수는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의 몸부림을 외면할 수 없어 인터뷰를 하게 됐다는 말이 실감난다. 위원회의 분위기는 진상 축소 내지 외면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다시 강조컨대 위원회의 진상보고서는 폐기하는 것이 옳다. 고 유치준씨에 대한 본지의 취재자료를 증거로 삼아 다시 작성돼야 한다. 경남신문이 어제 1946년 창간 이후 72주년이 됐다. 진실을 가리는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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