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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이상 유해의 통영시 귀환과 유가족의 자세- 김동규(고려대 명예교수)

  • 기사입력 : 2018-03-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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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5일 그동안 국내귀환을 두고 찬반 논란이 일었던 고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독일에서 통영시로 봉송되어 통영시추모공원 봉안당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그리고 이달 말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에 맞추어 통영국제음악당 내에 정식으로 안치한다고 한다. 통영시는 윤이상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2010년에 조성했다. 그는 10여 년간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작곡과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우리의 전통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려 왔다.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는 기념공원에서 추모할 인물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된 현대사의 시각으로 볼 때는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그의 생전의 행적이라고 본다.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그가 연루되면서부터 비극의 역사는 시작된다. 사형 2명을 비롯하여 30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70년 광복절 사면이 있을 때까지 2년여의 투옥생활이 그를 잘못된 길로 걷게 만들었다. 당시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와 같은 혁명공약 제1조를 국정기조로 했던 혁명정부의 지나친 조치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보지만 적어도 그는 친북좌경적인 활동으로 돌아서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87년에 평양에 들어가서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의 주제곡과 함께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하였고 1990년 10월에는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제’를 주관했으며 1992년에는 ‘민족과 운명’이라는 10부작의 영화 제작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또한 김일성 사망 1주기에 평양의 주석궁에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우리 역사의 최대 지도자…’ 라는 글을 남겼고 부인은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라는 표현으로 애도를 표현했던 것이다. 생전의 김일성이 윤이상 부부에게 베푼 은총에 대한 감동의 발로였다고 본다.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남한의 보수정권하에서는 자연히 그를 친북좌경인사로 단정하였고 따라서 통영시가 추진하는 윤이상 관련 기념관이나 국제적인 음악행사도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 사가들이 할 일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적어도 부인만이라도 이번의 유해귀국에 즈음하여 고 윤이상 선생님을 대신하여 남한의 국민들에게 사과문과 함께 감사의 성명서라도 발표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물론 고인이 간첩단사건으로 몇 년간의 고초를 당하면서 조국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친북적인 행동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분단 조국에서 양쪽으로부터 대접받고 환영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고인의 잘못으로 지금도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고통 받고 있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고인의 부인은 최소한의 기본 예의를 보여주어야만 된다고 본다.

    김동규 (고려대 명예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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