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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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20) 마산 추산테크(구 추산공업사)

40년 쉼 없는 두드림 … 기술은 예술이 된다
문신 작품 제작소

  • 기사입력 : 2018-03-1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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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는 1980년대 초. 마산 추산동 포교당(마산중앙포교당) 정법사 옆에 ‘추산공업사’라는 간판을 단 조그마한 공업사가 있었다. 1970년대 초에 문을 연, 주로 주택의 철제 대문과 빵 굽는 가마를 만드는 곳이었다. 활짝 열린 가게문 너머로는 늘상 작업자들이 분주하게 망치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랑스에서 귀국해 고향 마산에 정착한 조각가 문신은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현 문신미술관) 근처를 지나던 도중 포교당 갈림길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조그만 공업사를 발견했다. 그 후로 공업사를 지날 때마다 주인의 망치질을 유심히 관찰하던 문신은 어느 날 공업사에 가서 주인에게 말했다. “나랑 작업을 한번 해보면 어떤가.”

    조명덕(63) 추산테크(구 추산공업사) 사장이 기억하는 문신의 첫 스테인리스 작품 탄생 비화다. “아버지가 망치질하던 모습을 보시고는 (문신) 선생님이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었죠. 이 정도 기술이면 아마 작업을 해볼 만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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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 선생의 작품을 제작했던 추산공업사(현 추산테크), 현재는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옮겨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성승건 기자/


    문신의 ‘작업’이란 스테인리스로 조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흑단을 이용해 조각을 해오던 그는 새로운 소재를 찾았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스테인리스였다. 국내서 누구도 스테인리스 조각을 만든 적이 없을 때였고 나무와는 달리 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도 아니었다. 그가 계속 공업사를 주의 깊게 봐온 이유였다. 문신미술관 정경현 학예사는 “당시 국내 조각은 대개 나무, 석고가 주를 이루던 시기였고 선생님이 쓰던 흑단도 나무의 심지 부분으로 가장 딱딱한 재질이라 나름의 차별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는 욕구가 크셨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문신은 당시 추산공업사 사장이었던 조명덕씨의 부친에게 스테인리스로 조각을 만든다는 계획을 말했다. 계속 추산공업사를 꾸려가야 했던 부친은 20대 초반이었던 조씨를 불러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조씨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 첫 작업이 시작됐다.

    조씨는 월급을 받으며 문신의 작업실에 가서 일했다. 감각이 좋았던 문신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조씨가 망치질하는 모습을 몇 번 지켜본 후 금세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공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1980년대 초에는 작업에 쓸 수 있는 연장이 망치나 끌이 전부였다. 스테인리스를 자르는 것부터 모양을 내고 다듬는 작업까지 모두 망치질의 연속이었다. 말 그대로 ‘생판 노가다’ 작업이었지만 유럽에서 성곽 보수며 온갖 막노동으로 단련된 ‘베테랑 일꾼’ 문신과 군대를 갓 제대한 패기 넘치는 ‘젊은 피’ 조씨는 겁 없이 도전에 뛰어들었다. “지금처럼 레이저 같은 게 없을 때니까 다 망치로 했어요. 계속 두드려가면서 끊어내고 또 모양을 내고 그랬죠.”

    낮잠을 즐겼던 문신은 오후 3~4시쯤 일을 시작했고 새벽 3~4시까지도 계속했다. 창작열이 강했던 문신은 낮밤 없이 무시로 영감이 떠오르면 작업실에서 망치질을 했고 그때마다 항상 조씨도 함께였다.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조씨는 빙그레 웃었다. “즐거웠어요. 사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만드는게 뭔지도 몰랐어요. 근데 선생님이 그렇게 열심히 하시고 또 즐겁게 일을 하시니까 같이 했던 거죠. 새로운 걸 한다는 데 열정이 샘솟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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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미술관에 재현돼 있는 문신 작업실. 작업도구는 모두 당시 문신과 조명덕씨가 쓰던 것들이다.


    처음 수개월은 시행착오가 많아 재료도 숱하게 갖다 버렸다. 당시 스테인리스는 가격도 비싼 고급재료였지만 문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빼고 작업기간만 꼬박 5~6개월이 걸린 끝에 마침내 문신의 역사적인 첫 스테인리스 작품 ‘화(和)(1984)’가 탄생했다. 완성된 첫 작품은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시도로 국내 미술계 인사들을 비롯해 각 언론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작업실에 미술학과 교수나 다른 작가들이 숱하게 찾아오는 것을 보고 조씨는 그제서야 문신과 그의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고 한다.

    조씨는 이후에도 몇 년을 문신과 함께 작업했다. 워낙 호흡이 잘 맞았고, 힘들었지만 일도 재미있었던 까닭이다. 그때 완성한 작품들이 지금 문신미술관 야외정원에 설치된 화 시리즈와 우주를 향하여 시리즈 등 그의 대표작들이다. 워낙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 조씨는 지금도 문신의 여러 면모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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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미술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문신의 첫 스테인리스 조각 ‘화(和)’.


    “고집이 보통 아니셨어요. 집중력이 무척 강했고 말수는 적고 과묵했어요. 작품을 하다 마음에 안드시면 말없이 와서는 그라인더에 그걸 갈아버리곤 하셨죠. 화를 잘 내시는 스타일이 아닌데 화가 났다 하면 딱 보이는 게 눈썹이 꼿꼿하게 서요. 눈썹 숱이 워낙에 많아서 보통 사람들 하고는 다르게 눈썹이 꼿꼿하게 서거든. 돈은 전혀 모르는 분이에요. 늘 셔츠에 멜빵바지 차림이었는데 바지 옆 주머니에 만원짜리 한 장이 있던 게 한참을 지나도 그대로 있고 그랬어요. 어찌나 오래 있었는지 돈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니까요. 술은 거의 안 하셨고… 담배는 꽤 태우셨어요. 은하수 담배였던가.”

    문신의 신소재 조각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추산공업사의 이름도 널리 알렸다. 스테인리스에 관심을 갖는 조각가가 늘었고 추산공업사가 작품 제작 명소로 이름이 났다. 추산공업사는 자연스레 다른 작업보다 작품, 조형물 중심의 공업소가 됐다. 추산공업사는 1997년께 추산동에서 어시장 부근인 신포동 일대로 자리를 옮겼고 2011년께 신포동에서 진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작고한 조씨의 부친을 대신해 조씨가 사업을 물려받아 ‘추산테크’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추산공업사’로 통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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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작업으로 완성한 문신의 작품 표면에는 특유의 질감이 드러난다.



    추산테크는 지금도 수작업으로 작품을 완성해 내는 전국에 몇 안 되는 제작소다. 기계가 발전했지만 여전히 손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들은 추산테크를 찾는다. 명성이 높아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작업 의뢰가 들어온다. 조씨의 기술력과 작품에 대한 감각이 더해진 결과다. “작품을 제작하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예전 (문신) 선생님과 작업을 하면 왜 여기는 휘어져야 하는지, 또 끊어져야 하는지 의도를 찬찬히 설명해주시곤 했죠. 그때의 경험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키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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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산테크는 문신 이후에도 도내 조각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천원식, 심이성, 조용태, 이병호 등 도내 대부분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작품을 만든다. 이곳은 문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도내 조각사를 내내 함께해온 동반자인 셈이다.

    조씨는 지금껏 수백 점의 작품을 만들었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문신과의 작업이라고 했다. “선생님과의 작업은 평생 잊을 수 없죠. 선생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도 추산테크도 있는 거니까요. 자나깨나 작품만 생각하던 그 집념, 직접 손으로 때려가며 집중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해요.”

    문신이라는 거장이 남긴 것은 비단 작품만이 아닌 것 같았다. 거장의 열정은 조씨 같은 뛰어난 기술자와 후배 조각가를 키워낸 바탕이었다. 추산테크를 나서며 느꼈던 어떤 묵직한 경외감은 아마 그 땀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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