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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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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갈대와 기러기 그림- 변종현(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 기사입력 : 2018-03-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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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시골에서 겨울이 되면 기러기떼들이 줄 지어 날아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기러기들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내려앉아 먹이 활동을 하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밤이 되면 주로 갈대밭에 내려앉아 잠을 잔다고 한다. 동양화에선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를 ‘노안도(蘆雁圖)’라 한다. 기러기는 산수화에 있어 가을 경치를 대표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가운데 ‘평사낙안(平沙落雁)’이 포함되기도 한다. 노안도의 ‘노안(蘆雁)’을 ‘노안(老安)’과 같은 의미로 여겨 노후의 안락함을 기원하는 그림으로도 그렸다. 신사임당의 두 그림이 조선시대의 노안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 중기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明, 1533∼1592)이 쓴 <어주도(漁舟圖>(고깃배 그림)도 노안도라 볼 수 있다. 의병장으로 잘 알려진 고경명은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명종은 꽃과 새를 그린 62폭 병풍을 만든 뒤 제화시(題畵詩)를 고경명에게 청할 정도로 고경명의 시적 재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조판서 이양의 전횡을 논할 때 홍문관 교리로 참여했다가 인사 기밀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됐다가 곧 파직됐다. 그리고 정철과도 친밀한 관계였기에 정철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부침을 함께했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금산에서 전사했다. 고경명의 시는 다음과 같다.

    蘆洲風?雪滿空(노주풍점설만공) 갈대밭에 바람 불자 눈꽃인 양 날리는데

    沽酒歸來繫短?(고주귀래계단봉) 술을 사서 돌아 왔나 작은 배가 매여 있네

    橫笛數聲江月白(횡적수성강월백) 몇 마디의 저 소리에 강 위 달빛 환한데

    宿禽飛起渚烟中(숙금비기저연중) 자던 새는 물가 안갯속을 날아 오르네.

    이 시는 고깃배 그림을 보고 쓴 제화시(題畵詩)이다. 기구에서는 그림의 배경이 가을임을 나타냈다. 그림에는 바람이 불어 갈대가 흔들리는 모습과 갈대꽃이 눈꽃인 양 하늘 가득 날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雪滿空(설만공)’은 ‘하늘 가득 눈이 날린다’는 표현이나 하늘 가득 눈꽃처럼 날리는 갈대꽃의 모습을 형용했다.

    승구에서는 이러한 갈대밭 속에 작은 배가 매여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배 주인은 술을 사서 돌아와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있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몇 마디의 저 소리에 강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환하니, 자던 물새도 잠을 깨 안갯속을 날아 오르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몇 마디의 저 소리와 환한 달빛은 그림의 경지를 ‘고고(孤高)’한 분위기로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갈대밭에서 자던 새는 기러기이며, 그림은 노안도라 볼 수 있다.

    변종현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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