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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배운 헌법- 이학수(뉴미디어부장)

  • 기사입력 : 2018-03-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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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10일. 헌법학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그 학기 짧은 공부에 당시 제5공화국 헌법이 왜 나쁜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고민의 해답은 이랬다. 헌법철학자가 아닌 헌법해석학자의 이론서로 공부한 한계였다. 헌법해석학은 헌법전과 헌법을 구성하는 각종 법규의 조문들을 따져보는 분야다. 국가 긴급권은 강조하면서 법 조문에 없다는 이유로 국민 저항권은 외면했다. 어용학자들은 악명높은 유신헌법조차도 미화했다. 군사정권 아래서 학계나 언론계, 법조계가 바른 말을 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 시대였다.

    이날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열렸다.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국민의 열망이 분출했다. “호헌 철폐” “직선 개헌”. 개헌이 왜 필요한지를 거리에서 배웠다. 결국 집권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6월 29일 직선개헌을 받아들였다. 직선제 수용과 함께 대통령 임기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5년 단임이냐, 4년 중임이냐. 5년 단임은 국회의원 4년 임기와 달라 잦은 선거와 이로 인한 국론분열 우려가 있었지만, 5년 단임이 채택됐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대통령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5년 단임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16년 12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광장의 촛불집회는 헌법을 체득하는 산 교육장이 됐다. 헌법 제1조를 담은 이 노래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분노의 외침이었다. 최고 통치권자가 헌법을 수호하지 않는다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대한민국헌법은 1987년 9차 개헌 이후 30년간 손대지 않았다.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부터 1980년 5공화국까지 개헌은 잦았다. 4·19의거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육군 소장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곧바로 종언을 고했다. 1962년 제3공화국은 대통령 1차 중임 허용, 1969년 대통령 재임 3선 연장, 1972년 대통령 간선제와 함께 중임·연임제한을 폐지한 유신헌법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면서 임기 7년으로 개정했다.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면서 ‘누더기 헌법’으로 만들었다.



    2018년 3월. 청와대발 개헌 논의가 뜨겁다. 대통령 개헌안을 놓고 여야는 ‘밀당’에 들어갔다. 국민투표 시기, 권력구조 개편, 권력기관 개혁, 선거제도 등과 맞물려 정치적 수싸움이 치열하다. 대통령중심제, 내각책임제, 이원집정부제 각각 장단점이 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서 총리가 정치를 잘못하면 아무리 좋은 헌법이라도 무용지물이다. 결선투표제도 맹점은 있다. 2, 3등이 담합해 1등을 얼마든지 ‘왕따’시킬 수 있다. 좋은 말로 협치고, 실상은 야합일 수 있다. 지고지선의 법은 없다는 말이다. 역대 대통령 중 군사정권은 내란죄로, 문민정부는 친인척, 측근의 국정농단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헌법이 부실했다기보다 대통령이 의무를 다하지 못해 생긴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각 후보들은 지방선거와 개헌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기왕에 개헌에 나섰으니, 기본권 강화와 지방분권국가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 미래 정치세력에게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 여야가 조속히 합의안을 마련하길 기대한다.

    이학수 (뉴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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