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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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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 배한봉

  • 기사입력 : 2018-04-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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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 수술로 위를 떼어낸 어머니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세간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아팠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 아파서

    자꾸 하늘만 쳐다보았다.

    파랗게, 새파랗게 깊기만 하는 우물 같은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눈물도 못 흘리게 목구멍 틀어막는 짜증을 내뱉었다.

    낡았으나 정갈한 세간이었다.

    서러운 것들이 막막하게 하나씩 둘씩 집을 떠나는 봄날이었다.

    막막이라는 말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그 막막한 깊이의 우물을 퍼 올리는 봄날이었다.

    그 우물로 지은 밥 담던

    방짜 놋그릇 한 벌을 내게 물려주던 봄날이었다.

    열여덟 살 새색시가 품고 온 놋그릇이

    쟁쟁 울던 봄날이었다.

    ☞‘입춘’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다. 휘슬신호를 받은 대지는 다시 일 년 치의 새싹을 땅위로 밀어올리고 앙상한 가지마다 꽃송이를 내다걸고 새싹을 내다걸고 천지가 소생의 기운으로 술렁거리는 봄날, ‘암 수술로 위를 떼어낸 어머니’와 맞닥뜨렸을 때, 그것도 떠나는 날짜를 어림잡아놓고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눈물도 못 흘리게 목구멍 틀어막는 짜증’으로 감추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과 맞닥뜨렸을 때의 ‘하늘이 한꺼번에/쏟아질 것 같’은 절망을 ‘막막’과 ‘봄날’을 병치하여 극대화해놓고 있다. 거기다 어머니봄날의 상징물인 ‘놋그릇이/쟁쟁 울던 봄날’이라니 이 절묘한 공감각적 심상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슬픔을 맛보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아직 ‘막막’이라는 슬픔의 보균자일 것이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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