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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는 봄- 김달님(공공미디어 단잠 기획팀장)

  • 기사입력 : 2018-05-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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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니는 회사는 2년 전부터 오래된 주택을 임대해 사무실로 쓰고 있다. 사무실 가장 안쪽에 볕이 잘 드는 부엌이 있는데, 싱크대 위 작은 창문을 열면 앞집 마당이 보인다. 지금 사무실로 옮긴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마당을 보자마자 나는 앞집이 좋아졌다. 마당 왼편에 있는 작은 텃밭에 대파와 부추, 상추들이 생기를 뽐내며 자라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밭을 가꾸는 이의 살뜰한 손길이 느껴졌다. 주인이 누굴까 내심 궁금했는데, 얼마 뒤 밭을 돌보는 한 할머니를 보았다. 팔십은 훨씬 넘겼을 나이. 앞집엔 새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가끔 창밖을 보면 마당에서 빨래를 너는 할머니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로 수건과 속옷 몇 장이 다였고, 여름엔 모시옷 겨울엔 내복이 종종 섞여 있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수건 하나를 널고 숨을 돌리고, 다시 다른 빨래 하나를 널고 긴 숨을 내쉬었다. 깊은 산동네에 사는 내 할머니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모습이 생각나 앞집 마당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한동네에 살다 보니 사무실 근처를 걷다 보면 동네 한의원 계단을 내려오는 할머니와 마주치거나 유모차에 의지해 느린 걸음을 걸어가는 할머니 곁을 지나치기도 했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반가웠다.

    지난겨울, 한 아주머니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대뜸 앞집에 사는 할머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앞집 할머니의 살림을 도와주러 가끔 집에 들르는 사람인데, 며칠 째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중이라 했다. 그 후 며칠간 평소보다 자주 창밖을 내다봤다.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봤다. 어딜 다녀오신 거구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전 제법 쌀쌀한 날이 이어지다 초여름처럼 따뜻해진 날이 있었다. 웬일로 하늘도 맑았다. 싱크대 위 선반에서 컵을 꺼내다 앞집 마당을 봤다. 할머니가 널어둔 수건 몇 장 사이로 내복 상의가 보였다. 빨간색 보라색 꽃무늬가 그려진 겨울 내복이었다. 봄바람에 할머니의 내복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그 날 저녁 할머니는 잘 마른 내복을 겨울 옷과 함께 서랍 안쪽에 넣어두지 않았을까. 볕이 정말 좋았다. 틀림없는 봄날이었다.

    김달님 (공공미디어 단잠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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