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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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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23) 마산 ‘향도이용원’

46년째 깎고 다듬는 동네 사랑방

  • 기사입력 : 2018-05-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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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게 문을 통째로 덮은 쨍한 연두색 시트지 위에는 커다랗게 정자체로 ‘이발’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입구에 드리워진 흰색 발을 걷고 들어가면 줄지어 늘어선 고풍스러운 짙은 밤색의 이발소 전용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가게 안에는 나이 지긋한 주인 이발사의 사각거리는 가위 소리가 경쾌하다. 마산합포구 신포동에 있는 ‘향도이용원’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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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의 향도이용원./김승권 기자/


    자그마한 이발소는 대로변에 줄지어 선 많은 가게들 속에서 특별히 눈에 띄진 않지만 알고 보면 같은 자리를 20여 년째 지키고 있는 동네 터줏대감이다. 주인은 46년 경력의 베테랑 이발사 김영근(69)씨다. “1972년부터 여기 신포동에서 이발을 시작했어요. 원래 고향은 충남 금산인데 20대 초반에 마산에 볼일 보러 왔다가 우연히 지금 윤락가 부근에 있던 이용원 사장 눈에 띄어서 그 길로 가게서 일하게 됐지. 내가 고데 기술이 제법 좋았거든. 그때는 항도이용원이었는데 두 번째 가게로 옮기고 나서 향도이용원으로 이름을 바꿨어요. 가게는 3번 옮겼는데 다 신포동 자락이에요. 지금 가게가 3번째인데 올해로 22년째인가 23년째인가 그래요”. 김씨가 이용원의 역사를 간단히 들려준다.

    향도이용원은 보통 새벽 5시에 문을 열었던 다른 이용원과 달리 새벽 4시면 불이 켜졌다. 부지런하게 일했던 김씨는 몇 년 후 사장으로부터 향도이용원을 물려받았고 매일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문을 열었다. 미용실보다 이용원이 성업하던 시절이어서 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은 데다 마침 근처에 시외버스터미널도 있어 오가는 손님이 많았다. “많을 땐 하루에 수십 명씩 머리를 잘랐어요. 한 50명쯤 잘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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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신포동 향도이용원 입구.



    1970~80년대 이용원은 마을 소식통 1번지였다. 온 동네 주민들이 모여 갖은 동네 이야기를 다 하던 곳이 이용원이었다. 이용원 한편에 자리 잡은 의자에는 늘 동네 주민들이 모여 ‘냇가에 미꾸라지 낚시를 하러 가자’, ‘오늘 몇 시에 막걸리 한잔 하자’ 같은 약속을 잡았고 ‘누구네 집 자식이 언제 결혼한다더라’, ‘우리 집 애가 속 썩여서 못살겠다’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발사들은 집집마다 수저 개수도 안다고 할 만큼 동네 사정에 빠삭했다. 김씨는 ‘신포동 이발사’이자 비공식적인 ‘동네 호적계장’이었던 셈이다.

    “파출소장이 밤에 마을 순찰을 돌잖아요. 다음날 아침이면 이발소에 얘기가 다 들어와. 전날 누가 술을 많이 먹었다는 둥 몸싸움이 났다는 둥 최신 소식이 항상 업데이트가 돼요. 누구 집 자식이 서울에 있어도, 외국에 나가 있어도 뭐하고 사는지가 다 들어오게 돼있다니까.” 김씨가 껄껄 웃는다. “단골손님이 서로 싸워서 오는 경우가 있어서 내가 자리를 만들어서 화해를 시켜주기도 했어요. 참 별별일들이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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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영업을 해온 만큼 이발소 곳곳에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았다. 입구 천장 쪽에 설치된 커다란 대우전자 에어컨이 눈길을 끈다. 소리가 너무 크긴 하지만 냉방기능은 아직 건재하다. 붉은 녹이 올라온 예전 이발도구들도 있다. 김씨는 위생 문제로 주기적으로 가위와 빗을 교체하고 있지만 예전에 쓰던 도구들을 모아뒀다. 면도칼을 벼르던 가죽띠와 바리깡을 대신하던 가위가 새롭다.

    단골손님도 많다. 향도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의 9할은 단골들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40년째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다. 김씨가 처음 이발을 시작했던 1972년부터 지금까지 찾아오는 손님도 있단다. “바로 옆에 삼익맨션 사시는 어르신인데 연세가 아마 95세쯤 되셨을 거예요. 6·25 참전용사인데 요즘은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대화하기가 어려워.”

    향도이용원의 단골에는 동네 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역 명사들도 많다. 이재욱 노키아티엠씨 전 회장, 이주영 마산합포구 국회의원, 몽고식품 김만식 전 회장을 비롯해 역대 mbc경남, 경남신문 회장이 단골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해수부 장관이었던 이주영 의원이 덥수룩하게 길렀던 머리를 이곳에서 잘랐다. 김만식 전 회장은 면도파다. 취재 당일 향도이용원을 찾은 김 전 회장은 자연스레 면도를 위해 의자에 누웠다. “난 이틀에 한 번꼴로 면도하러 와. 여기가 매주 화요일 휴무라 그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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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도이용원에 놓여 있는 표창장과 감사장.


    면도는 김씨의 부인 김순단(62)씨 담당이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후 이용원에 나와 남편으로부터 조금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지금은 남편 못지않게 면도 베테랑이다. “오시는 손님들하고는 워낙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예요. 가끔이긴 하지만 면도하다가 실수할 때도 있는데, 그냥 별 말 않고 넘어가 주시고 그러죠.” 김씨가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손님이 대부분 단골이다 보니 자리에 앉으면 바로 가위질이 시작된다. 이발사는 어떻게 해드릴까 묻지 않고 손님도 별다른 주문이 없다. 취재 당일 이발을 하고 있던 백발의 노인은 이발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왜 이곳을 계속 찾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저 “나랑 잘 맞아요. 안 맞으면 올 수 없지”라는 짤막한 대답만 돌아왔다. 김씨가 노인이 떠난 후 말을 꺼낸다. “한 30년 넘게 오신 분인데 고등학교 교장을 오래 하셔서 고지식한 옛날 사람이에요. 남한테 지저분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고 예전에도 항상 외출할 때 고데나 드라이하고 가셨거든. 1년에 한 번씩 제자들하고 만나는데 그때마다 머리하러 오시고. 오늘도 병원에 약 타러 가시는데 이발하러 오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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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도이용원 김영근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역시 30년 단골이라는 이성훈(56)씨는 가게에 들어오더니 대뜸 냉장고를 열어 요구르트를 꺼내 마시고는 자리에 앉았다. 완월동에 산다는 이씨는 “20대 때 처음 왔을 때도 딱히 구체적으로 주문한 적은 없고 그냥 깔끔하게 해달라고만 얘기했었어요. 사장님이 얼굴형에 맞는 스타일을 잘 찾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얘기 안 해도 알아서 잘 해주시니까 좋죠” 한다.

    주 고객층은 60대 중후반이지만 30~40대 젊은 사람들도 없지 않다. 대개 아버지를 따라온 대를 이은 손님들이다. 이발의 매력을 알게 되면 미용실보다는 이발소를 찾게 된다는 게 김씨의 지론이다. “단골손님 중에 유 교장 선생님이라고 있는데 20대 아들이랑 같이 온 적이 있어요. 머리를 하고 간 후에 아들이 아버지한테 막 화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머리 스타일이 이상하다고. 근데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온 거예요. 혼자. 이발의 맛을 알게 된 거지.” 30대가 돼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때가 되면 항상 이발을 하러 온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어린 손주가 함께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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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도이용원에 설치돼 있는 대우 에어컨.



    향도이용원은 신포동에 남은 몇 안 되는 이발소다. 이용원이 잘나가던 시절 동네마다 10곳 가까이 되던 것이 미용실에 자리를 내주며 점점 자취를 감춘 까닭이다. 하지만 신포동의 작은 이용원은 잊혀가는 쓸쓸한 추억 속 장소가 아니었다. 2시간여 남짓 취재를 하는 동안 이용원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단골손님 예닐곱 명, 주변에서 가게를 하는 사람, 예전에 이발소를 운영했던 사람, 동네 주민들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주인 김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누가 추억은 힘이 없다고 했던가. 동네의 40여 년 추억을 품은 이용원은 지금도 건재한 ‘신포동 사랑방’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이발을 하던 단골손님이 말했다. “사장님 내외가 건강하게 이용원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아주 오래 말입니다.”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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