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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말 - 박경리

  • 기사입력 : 2018-05-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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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했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 박경리 선생의 인생관을 시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은 말년의 시 중에서도 시로 쓴 자화상 같은 이 시를 읽으면, 큰 글을 쓸 사람은 하늘이 애초 큰 글쓰기 운명을 세팅해서 이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살아생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문학적 업적을 이루시고 수많은 독자들의 추앙을 받으셨으면서도, 정작 당신께선 영광도 사명도 아니었고 ‘아무도 무엇으로도/고삐를 풀어주지 않’는 ‘글기둥 하나 잡고/내 반평생/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다니 말이다.

    또한 소설 속에서 수백 명의 인물을 낳고 키워 내신 큰 어머니이기도 한 선생께서 어느 시의 말미에 ‘우주만상 생명 있는 것/모두 한(恨)이로구나’라고 한탄하신 것을 보면, 피조물로서 산다는 것은 저마다 세팅된 연자매를 돌리는 ‘눈먼 말’ 같은 것인가 보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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