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 20일 (목)
전체메뉴

사철나무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 기사입력 : 2018-07-26 07:00:00
  •   
  • 메인이미지
    메인이미지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사철나무 그늘’의 그림자 같은 이 시를 염천 무더위를 식히는 한자락 마음그늘로 읽으려면, 우선 이 시의 군데군데 배치돼 있는 실현 불가능을 암시하는 ‘좋겠다’ ‘좋을 것이다’를 실현 가능함을 암시하는 ‘좋다’로 바꿀 것. 그리하면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을 수 있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어도 좋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천국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그늘을 빼앗으려는 복병처럼 나타난 ‘바빌론 강가’는 이 땅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다고 시치미 뚝 떼버리면 그만…. 조은길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