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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인문학의 위기- 김흥년(시인)

  • 기사입력 : 2018-07-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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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의 많은 낱말들이 한자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보니, 한글로 적었을 때 뜻을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인문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것들도 그렇다. 국어사전에서 이런 낱말들의 뜻을 찾아 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럴 때는 한자어 글들을 하나씩 뜻풀이를 해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문’은 사람 인(人)에 글월 문(文)이니, ‘사람에 대한 글’이라는 뜻이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글’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의 대표적 학문을 흔히 문(文學), 사(史學), 철(哲學)이라 한다. 문학은 소설처럼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다룬다. 사학은 ‘예전에 있었던 삶의 이야기들’을 다룬다. 철학은 그런 이야기들 중 ‘오늘 가장 바람직한 삶의 이야기들’을 고른다.

    인문학을 영어로는 ‘휴매너티즈(Humanities)’라 하는데, 이 말은 그냥 ‘인간적인(human)인 것들(ities)’을 가리킬 뿐이다. 사람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인문학의 대상인 셈이다. 요즘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우리가 사람이면 우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문일 텐데, 왜 인문학이 위기를 맞은 것일까? 이제 우리가 사람이 아니란 말일까? 우리의 삶이 옛날과 너무 달라졌다는 말일까? 둘 다 옳은 말이다. 사람에 대한 옛날의 그럴듯한 정의들을 모두 바꿔야 할 판이고, 우리의 삶들도 엄청나게 가지 수가 불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데 대해 지난날만큼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니, 대학교의 인문학 전공자들도 빠르게 줄어든다. 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 탓만 한다.

    물론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다. 요즘 세상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라는 조선 시대 선비의 삶을 바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이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인기가 없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 돼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먹고사는 일을 ‘사람답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개돼지처럼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의 본성부터 깨치고, ‘사람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인문학이 바로 그런 것에 대한 공부다. 인문학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태어나 어른이 되고 죽을 때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인문학 공부다. 어릴 때는 어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어른이 되면 스스로 터득하는 길뿐이다. 인문학은 이렇게 시작과 끝이 나뉘는 공부가 아니다. 이런 공부에 게으른 사람은 먹고사는 일의 질(quality)이 떨어지고, 개돼지 소리를 듣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람다움’에 눈을 감고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린 탓도 있지만, 인문학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데서도 생긴다. 그렇게 된 데는 인문학자들의 잘못도 크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어려운 낱말들로 꾸며 잘 알아듣지도 못하게 해 놓고, 인문학에 목마른 사람의 허영만 치켜세운 것을 뉘우쳐야 한다. 심지어 인문학자 자신이 그런 인문학에 파묻혀 우쭐거리며, 인문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우리는 속히 인문학에 대한 거북함을 떨쳐야 한다. 인문학은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들에 대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김 흥 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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