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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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종현 (사)한국인명구조봉사협회장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목숨 구하고 지켜야죠
윈드서핑·스키 등 못하는 스포츠 없는 ‘스포츠광’
11살 때 태권도 배워 해군 태권도 감독까지 지내

  • 기사입력 : 2018-07-2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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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9일 오후 1시 40분.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창원 진해구 이동운동장 스탠드 아래에 있는 (사)한국인명구조봉사협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땀에 전 옷을 갈아입는 김종현(64) 회장의 상체를 의도치 않게 훔쳐보게 됐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가슴과 어깨근육은 60대의 몸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탄탄했다. 악수를 하고 자세히 들여다본 그의 얼굴도 예사롭지 않다. 길게 내뻗은 눈썹과 날카롭지만 서글서글한 눈매가 한눈에도 군인이 연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전직은 해군이었다.

    “평생 운동을 했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해 중·고등학교 때 선수생활을 하고, 하사관으로 해군에 입대해서도 태권도병으로 있다가 태권도 교관, 해군 태권도 대표팀 감독까지 했습니다. 요즘도 윈드서핑이나 스쿠버다이빙 등 안 하는 해양스포츠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는 겨울이면 강원도 스키장으로 가서, 젊은 사람들도 힘들다는 크로스컨트리 심판도 하고 스키장 안전요원으로 근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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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현 한국인명구조봉사협회장이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응급구조장비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전강용 기자/



    ◆태권도 소년에서 해군으로=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큰형을 따라 배우기 시작해 11살 때 태권도에 정식으로(?) 입문한다. 고등학교 입학 무렵 아버지께서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워져 고민 끝에 고등학교 3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7년간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해군 하사관을 신청해 합격한다. 해군에 입대 후에도 태권도 특기를 인정받아 함정에서 4년간의 근무를 제외하고는 해군 태권도 선수와 교관을 하고, 해군 태권도 대표팀 감독을 10년간 역임하는 등 34년간의 군 생활 대부분을 태권도와 함께한 뒤 지난 2008년 원사로 전역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도 2004년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해 현재 과학수사관으로 복무 중이다. 군 생활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입대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며 은근히 대를 이은 자식자랑도 한다.

    ◆4분의 기적 심폐소생술을 배우다= 그가 체계적으로 심폐소생술을 배운 것은 해군에서 태권도 감독으로 있던 2005년이다. 시합 현장 등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고들을 지켜보며 인명구조는 현장에서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심폐소생술 등 인명구조와 관련한 응급처치법을 배웠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진해마라톤대회에 안전요원으로 나서면서 인명구조 활동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여러 단체에서 인명응급구조원으로 활동하다가 보다 체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자는 취지로 동료들과 함께 지난 2017년 2월 사단법인 한국인명구조봉사협회 설립을 추진해 올 1월 설립 허가증을 받았다. 인명구조와 관련한 사단법인 신청은 도내에서 처음이라 여러 가지 서류를 보완하고 확인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현재 협회는 17명의 회원이 있고 순수 회비로 운영되는 자원봉사단체다. 각자 직업이 있는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워 두 달에 한 번 모여 숙달훈련을 한다. 인명구조봉사활동은 시간이 되는 회원들만 참석한다. 이들은 도내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마라톤대회를 비롯해 서울과 춘천 등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안전구조지원팀으로 달려가고, 일선 학교와 단체를 돌며 심폐소생술 무료 특강도 하고 있다.

    순수 봉사단체인 만큼 수익사업을 하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하다 보니 사무실 운영비도 빠듯하다. 무엇보다 인명구조 관련 장비나 교육장비 대부분이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가여서 김 회장 사비로 산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지속적인 장비 관리비가 들어가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도 그는 “퇴직한 지 10년이 지났고,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에 협회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 관의 지원을 받거나 수익사업을 하라는 말이 많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며 아직은 순수 봉사단체로 남고 싶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많은 생명 구해도 못 구한 생명에 고통= 그동안 그와 동료들이 목숨을 구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지난 2016년 서울에서 열린 모 전국마라톤대회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철수하려는 순간 결승선에 사람이 쓰러졌다는 신고를 받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트랙에 쓰러져 있는 참가자를 심장제세동기(AED)까지 사용한 끝에 겨우 살렸다. 도내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서도 코스를 점검하다 차량에 쉬고 있는 여성 마라토너를 발견하고 확인해 보니 심장이 멎은 상태여서 심폐소생술로 목숨을 구했다. 모두 2~3분 안에 발견돼 응급처치를 해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생명을 구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지지만 구하지 못한 생명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에 시달린다고 한다. 어느 태권도 대회 도중 한 학생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가 다른 사범과 함께 심폐소생술을 통해 학생의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하고 병원 응급실로 보냈는데 얼마 뒤 응급실에서 숨졌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 살아 있었던 학생이 숨지자 이후 6개월가량 학생을 살리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환영과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그에게도 삶의 위기는 있었다. 지난 2011년 건강검진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이듬해인 2012년 위 3분의 2를 잘라내는 수술과 함께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힘들고 지쳤지만 투병 중에도 인명구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인명구조활동에 나가지 말라고 강하게 반대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몸을 지탱할 수도 없었지만 사명감이 현장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2016년 12월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남은 인생도 봉사의 길을= 그는 요즘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학교에서도 교육을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지만 여전히 부모들의 변화는 없다고 아쉬워했다. 심폐소생술 교육현장에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은 옆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지켜만 볼 뿐 자신들은 참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심폐소생술은 국민 모두가 배워야 하는 것이다. 국민 20%가량이 심폐소생술을 배웠다고 하는데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은 다르다. 옆에 있는 가족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서로 도와줄 수 있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심폐소생술은 4분 안에 해야 50% 생존 확률이 있다. 신고를 하고 119구급대나 의료진이 빨리 도착해도 8~10분인데 그때는 사실상 뇌사상태로 늦다”며 현장 응급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인명구조에 사용되는 장비가 일반 가정에도 소화기처럼 하나씩 구비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고가인 점은 개선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취재 말미에 접어들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아내와 협회 구조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인명구조활동을 위해 한 달에도 4~5일은 집을 비워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지켜봐준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워했다. 대원들 역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자부심과 사명감 하나로 구조봉사에 빠짐없이 참여해줘 늘 감사하고 자랑스럽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인명구조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면서 “협회에 더 많은 회원들이 들어오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활용해 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이현근 기자 san@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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