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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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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인연의 깃을 여미는 시간- 고영문(창원문화재단 경영지원본부장)

  • 기사입력 : 2018-10-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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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깊어 사람의 마음까지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날, 잠시 시간을 내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책장 속의 편지들을 정리한다. 인적 드문 산중의 수북한 나뭇잎처럼 갖은 추억들이 한잎 두잎 불려 나와 마음 한쪽을 곱게 물들인다.

    예전에 근무하던 곳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거나 서로의 마음 나눔이 필요할 때 말보다는 글을 건넸다. 주고받은 편지들은 부서를 옮길 때마다 출력해서 보관해 두었다. 연도와 날짜를 구분해 한 장 한 장 정리하면서 편지의 주인들을 떠올려본다. 하소의 글, 축하의 글, 화해의 글, 반성의 글들이 가을 단풍처럼 색색의 모습들로 그려진다.

    ‘한 사람의 삶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알게 된다는데요. 저는 아침에 깨어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라는 편지를 남긴 친구는 결국 혼자만의 길을 선택했다. 맑은 심성을 가진 친구였는데 지금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만남은 우연이었고 헤어짐은 필연이라고 합니다. 함께했던 시간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묻어두겠습니다’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편지의 주인은 제법 높은 간부가 되어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는 막내 아우 같은 친구로 곁에 머물러 있다.

    ‘이른 아침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겠죠. 어느 날 아무런 약속이 없을 때 전화하시면 멀다 않고 달려가 술친구가 되겠습니다’는 글을 보내준 새내기 직원은 바지를 즐겨 입는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시간에 쫓기는 출근 시간에도 늘 웃음 띤 얼굴로 반겨준다.

    ‘저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주 반성을 합니다마는 그런 반성이 자신감을 뺏어갑니다. 그래서 그냥 스스로를 후하게 변호하며 살아가렵니다’며 스스로를 심하게 다듬고 곁을 주지 않던 친구는 아직도 까칠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추억들을 더듬다 보니 잘 보관해둔 편지들의 소중함이 새삼 느껴진다.

    스산함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절이다. 묵은 편지를 들춰보는 것은 인연의 깃을 여미는 시간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스함이 오가도록 하는 인정의 시간 말이다. 모든 이들이 쌀쌀한 가을을 넘어 차가운 겨울까지 따습게 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모처럼 펜을 들어 메마른 세상에 편지를 쓴다.

    고영문 (창원문화재단 경영지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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