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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부마항쟁 고통 하루빨리 끊어지길

  • 기사입력 : 2018-10-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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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죽음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념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 18일 ‘제39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3·15아트센터 대극장의 맨 뒤 구석진 곳에서 만난 유성국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씨는 마산에서 항쟁이 시작된 1979년 10월 18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 유치준씨의 셋째 아들이다. 유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맘 편히 자리에 앉지 못하고 한동안 서성거렸다.

    39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유씨는 아버지를 잃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79년 11월 초 즈음, 지난 10여일 동안 가장이 돌아오지 않아 불안해하던 유씨의 집에 경찰이 찾아왔고, 유씨 가족은 마산시 성호동 서원곡의 한 야산에 가매장돼 있던 아버지 시신을 목격했다.

    유씨는 지난 11일 기자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인생을 살면서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라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껏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린 어머니(86)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조사가 시작된 이래 제게 매일 ‘(진상조사 결과) 언제 나노, 언제 나노’라고 물어 보셨죠”라고 했다.

    고 유치준씨의 죽음을 포함해 부마항쟁의 진상규명은 더디기만 하다. ‘도시락 통에 주민등록증이 있어 신원파악이 늦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하며 숨진 지 2주가 넘어서야 유족을 찾아온, 그리고 유족도 모르게 부검한 뒤 야산에 시신을 묻었던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이 오랜 기간 더 이어졌기 때문일까. 그러나 군사정권이 사라진 뒤에도 그리 신통치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그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이듬해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유신 찬양 인사들이 위원으로 다수 선정돼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3년간의 조사 끝에 위원회가 내놓은 진상조사보고서(안)는, 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정부 차원의 공식 보고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낮은, 잘 쓴 석사학위 논문보다 못한’ 보고서였다.

    앞선 세대의 피맺힌 항쟁 끝에 이룩한 평화를 누구든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누구를,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기억할지는 진상규명이 동반되지 않고선 허망한 일이다. 내년 기념식에서는 편히 자리에 앉아 있는 유씨의 모습을 보고 싶다.

    안대훈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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