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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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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얼매나 식겁을 했던지…- 채은희(경남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장)

  • 기사입력 : 2018-10-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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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추석에 시댁에 갔다가 작고하신 시어머니와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 할머니를 만났다. 97세인데도 아직도 정정하시며 나를 알아보곤 무척이나 반기신다. 가끔씩 뵈었던 시어머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고 허전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언젠가 시어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라 단짝 친구 할머니가 저녁 찬거리나 장만할까 싶어 경사진 산비탈 길을 한참 걸어서 밭에 도착했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평생을 다닌 곳이라 모든 것이 익숙하다.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참깨며 고추 등을 둘러보고 있는데 콩밭 쪽에서 사람 코 고는 소리가 드르릉 드르릉 들려서 혹시 할머니 아들이 밭에 일하러 왔다가 더위에 지쳐 콩밭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가 하고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아이코! 집채만 한 시커먼 산돼지가 배를 불룩불룩하면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그 할머니는 산돼지를 보는 순간 돌아서 달아나야 되겠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산돼지가 기척을 알고 일어나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니 몸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전혀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빨리 달아나야 된다는 일념으로 집까지 오긴 했는데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며 시어머니한테 밭에는 혼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까닥했으면 인아 할매도 못 보고 죽었을 끼다’면서. 얼매나 식겁을 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난다며 가쁜 숨을 내쉰다.

    이것이 바로 급성 스트레스 증상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갑작스럽게 위기를 겪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말로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만 실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대개 우왕좌왕하게 된다.

    당시에도 90세가 넘었던 할머니가 위기상황에서도 정신을 가다듬고 상당한 거리를 무사히 내려오신 것을 보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농촌 생활에 익숙하고 세상 연륜이 풍부한 분이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채은희 (경남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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