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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③ 항일의병 중심지 하동

의병 서훈자 17명 도내 최다 … 항일운동 본거지
지리산 중심으로 항일의병 전투 치열

  • 기사입력 : 2018-10-2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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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작은 고을, 하동의 독립운동 열기는 깊고도 치열했다. 조국을 되찾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산천에 흩뿌려졌다. 그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들이었다. 하동읍내 지역민들도 가세했다. 면장과 지역민들은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며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학생들도 독립을 외치며 일본에 항거했다.

    이렇듯 항일의병으로 시작해 3·1독립만세운동, 의열투쟁, 청년항일운동까지 이어진 하동의 독립운동사 속에서 많은 열사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들 중에는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이름 한 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도 있다.

    하동군이 경남독립운동연구소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미발굴된 독립운동가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수조사 결과 지난 8월에는 미발굴 하동 출신 독립운동가 21명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현재 하동에는 62명이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았으며, 특히 항일의병으로 서훈을 받은 이는 도내에서 가장 많은 17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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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의병의 중심지, 하동

    1907년 12월, 하동군 악양면 악양천의 맑은 물이 붉게 물들었다. 의병장 박매지가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 수비대를 습격하면서 벌어진 격전이었다. 하천에는 일본군의 시신들이 무더기로 쌓였고, 박매지는 이날 300명의 의병 중 80명을 잃었다.

    2018년 10월, 100년 전 치열했던 전투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악양 취간림에는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이 오롯이 서 있었다. 숲속 한가운데 세워진 기념탑에는 ‘1905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대표적인 항일독립투사’라는 제목으로 수백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져겨 있다. 그 옆으로는 고 정서운 위안부 할머니를 추모하는 평화의 탑과 민주·자유·평화의 상이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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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 악양면 취간림에 있는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성승건 기자/


    특이한 점은 기념탑에 하동 출신 의병은 물론 서부경남과 전남 지역 의병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지리산이 당시 의병 운동의 본거지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지리적 위치와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 덕분에 지리산에는 각지의 의병들이 모였다. 그 중심인 하동이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동의 의병은 한국 군대 해산 이후인 1907년 이후 활발하게 일어났다. 경남독립연구소는 이들을 후기 의병으로 구분하는데, 전기 의병은 1895년 단발령과 을미사변에 분노해 유생과 관군이 일으킨 의병을 말한다. 후기 의병은 전기에 비해 더 체계적인 전투력과 무기를 갖춘 무장의병이었다. 하동에서는 후기 의병운동이 시작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 의병 1500명 중 1057명이 전사했고, 수백명이 다쳤다. 그중 대표적인 의병은 박매지, 임봉구, 이성로, 우수보, 김의홍, 조기섭, 손몽상, 박홍지 등이 있다. 그중 박매지(박인환·박마야지/ 1882~1909) 의병장은 당시 경남창의대 총대장으로 활약하며,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병단을 이끌었다. 사격의 명수로 알려진 박매지는 하동경찰서를 습격하고, 산청 경찰서와 군청, 하동군 일신일어학교를 습격해 불태우고 일진회원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박매지는 1909년 7월 22일 진주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지만 그의 기록은 많이 남지 않았다. 경남독립연구소에 의해 뒤늦게 발굴된 박매지는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1907년 8월부터 1909년 8월까지 2년에 걸쳐 일제의 의병토벌 작전에 의해 많은 의병들이 전사 체포 또는 해산돼 전국 의병들이 대폭 감소했지만, 박매지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하동의 의병진은 한일병탄 직전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다”며 “이처럼 하동을 중심으로 발발한 의병운동이 결국 대중들의 반일투쟁 정신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현재 하동 출신 의병 중 17명이 서훈을 받았으며, 이는 경남 지역의 항일의병 중 가장 많은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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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독립공원 내 하동의 독립선언서.


    ▲하동의 3·1운동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79-3, 산 언저리에는 ‘하동독립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난 2011년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든 이 공원에 올라서면 하동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는 읍내 곳곳이 하동 독립운동 주요 유적지다.

    공원에는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함꼐 하동의 독립선언서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하동 3·1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1919년 3월 18일 적량리 하동시장에서 당시 적량면장이던 박치화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작됐다. 양보일신학교 교사 정세기와 정성기, 정윤기, 황확성 등의 주도로 읍민들과 상인들이 일제히 동참했고, 인파는 순식간에 1500명이 넘었다. 일본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고 박 면장을 검거했다.

    당시 박치화가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는 지역민 12명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당시 경성이 아닌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곳은 전국에 2~3곳밖에 없었다.

    이후 금남면 출신 정낙영과 이범호, 정희근 등은 남해까지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유림 정규영 선생은 1919년 파리민족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한독립선언문인 파리장서에 이름을 올렸다. 하동에서는 총 17회의 3·1만세운동이 벌어졌고, 1만2000명이 참여했으며, 사망자 수도 17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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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청년운동의 중심이 됐던 하동청년회관.


    ▲3·1만세운동 이후 청년 항일운동

    하동독립공원에서 보면 앞쪽으로 붉은 지붕의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은 항일 청년운동의 중심이 됐던 하동청년회관이다. 독립만세 운동 이후 청년운동으로 확산된 항일 투쟁이 중점적으로 펼쳐졌던 공간이다.

    회관은 1926년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하동청년동맹’이 앞장서고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하동읍 읍내리 441-1에 건립됐다. 하동 청년지도자들은 이곳에서 3·1정신을 계승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을 위한 다양한 민족교양강좌를 가졌다. 조동회, 김익원, 김태두, 김계영, 김태영 등 당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이곳에서 하동 벽보신문인 <뭇소리 1호>를 발행하기도 했고, 특히 전국 최초 좌·우파 계열이 통합해 발족한 ‘신간회’ 하동지부 결성식도 이 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1930년대 일제가 이들의 활동에 탄압을 가하면서 청년회관에서의 활동은 중단됐다.

    이후 일본에 의해 공회당으로 사용됐던 이 공간은 고등공민학교, 국민보도연맹 사무실 등 얄궂은 운명을 버텼고, 지금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소유로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와 하동지역자활센터에서 사용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전국 청년회관 26곳 중 지금까지 보존된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회관 앞에는 지난 1989년 6월 10일 6·10독립만세 항쟁기념일을 기념하는 ‘우국항일’(憂國抗日) 비석이 있다.

    정재상 소장은 “하동은 의병부터 만세운동과 여성운동, 청년운동까지 독립운동을 다양하고 치열하게 펼쳐져 온 곳이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며 “하동의 독립운동 연구를 통해 다양한 항일 흔적들을 찾고 후세에 알리고 그 정신을 잇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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