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30일 (토)
전체메뉴

쓸쓸함의 비결- 박형권

  • 기사입력 : 2018-12-13 07:00:00
  •   
  • 메인이미지


    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밖과 문 안의 적요가 소문처럼 만났다

    적요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탱탱하여서 느슨할 뿐

    안과 밖의 소문은

    노인과 내가 귀에 익어서 조금 알지만

    그 사이에 놓인 경계는

    너무나 광대하여

    그저 문풍지 한 장의 두께라고 할 밖에

    문고리에 잠깐 머물렀던 짧은 소란함으로

    밤은 밤새 눈을 뿌렸다



    어제 오늘 끊임없이 내리는 눈에 관하여

    나직나직하게 설명하는

    저 마을 끝 첫 집의 지붕



    나는 이제 기침소리조차

    질서 있게 낼 만큼

    마을 풍경 속의 한 획이 되었다

    나도 쓸쓸한 노인처럼

    아무 뜻 없이 문 여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

    실은 어제 밤새워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

    나는 문을 열었다

    ☞ 윤오영의 수필 ‘달밤’과 박형권의 시 ‘쓸쓸함의 비결’은 매혹적이다. ‘달밤’ 속에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쓸쓸함의 비결’ 속에 ‘쓸쓸한 노인이/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이미지가 매혹적이다. ‘달밤’ 속에‘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쓸쓸함의 비결’ 속에 ‘문고리에 잠깐 머물렀던 짧은 소란함으로/밤은 밤새 눈을 뿌렸다’ 이미지가 매혹적이다.

    ‘달밤’ 속에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쓸쓸함의 비결’ 속에 ‘나는 이제 기침소리조차 질서 있게 낼 만큼/마을 풍경 속의 한 획이 되었다’ 이미지가 매혹적이다. ‘달밤’ 속에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쓸쓸함의 비결’ 속에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나는 문을 열었다’ 이미지가 매혹적이다. 어떤 관념에도 노출되지 않은 쓸쓸함의 오지를 발견한 듯 가슴 설레는 쓸쓸함이다, 매혹이다. 조은길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