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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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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비 내리고(편지1)- 나희덕

  • 기사입력 : 2018-12-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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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요즘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예술작품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노래의 스테디 주제가 사랑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쑥스러워했던 구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조차도 스스럼없이 손 하트, 팔 하트,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왜 이리 반인륜적인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걸까!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넘침에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해서 그 의미가 희석돼버린 것은 아닐까! 아직 희석되지 않은 사랑의 원형 같은 이 시는 사랑의 뜨거웠던 시간이 지나고 이별의 기로에서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라고 진술함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자신보다 더 아파할 사람을 위해 이별의 아픔을 숨기는 일심동체의 완전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미덕은 대개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라로슈푸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기심이 생존본능으로 주입돼 있는 존재에게 이런 사랑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생각하면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구절이 뿜어내는 사랑의 향기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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