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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⑤ 독립운동 산실 사천

불교계 대표 항일 비밀결사단체 ‘만당’ 태동

  • 기사입력 : 2019-01-0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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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초등학교에 있는 ‘독립운동한 이들의 기념비’.

    사천은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사천 봉명산 자락의 다솔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곳을 승병 기지로 삼아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과 최범술, 김법린 등이 은거지로 삼아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민초들은 곤양면, 사천읍, 삼천포 등지 전역에 걸쳐 만세운동을 전개해 지역민들의 돋보이는 독립정신을 보였다.



    ▲독립운동 요람 ‘다솔사’= 사천 곤명면 봉명산 자락에는 1500여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찰 다솔사가 자리하고 있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 계미년(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바도 크다. 사천지역은 예로부터 항구로서 대륙을 건너는 교량적 역할을 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끊이질 않았다. 다솔사는 승려와 지식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이 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 삼아 의병활동을 한 것이 잘 알려졌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앞서, 이곳 요사채 안심료에 머무르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집필하며 공약 3장을 덧붙였다. 다솔사에서 전개된 또 하나의 특기할 민족운동은 ‘만당(卍堂)’ 결사운동이 있다. 다솔사에서 불교계의 대표적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이 태동했다. 1930년 5월 한용운의 민족의식에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의 극복,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목적으로 모여 수년간 일제에 투쟁했다. 그러나 만당은 1938년 말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진주경찰서에 발각된다. 서울과 사천, 진주 등지에서의 6차례에 걸친 일본 경찰의 검거로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 박근섭, 김범부 등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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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다솔사 요사채 안심료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곳이다./김승권 기자/

    ▲만세운동 중심 ‘민초’= 사천은 일제강점기 삼천포항을 중심으로 일제가 집성촌을 이루면서 수탈과 탄압이 극심해진다. 그럼에도 애국 청년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만세운동의 주축이 돼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사천의 만세운동은 읍·면 단위 전역에 이를 만큼 활발히 전개됐다는 점에서 당시 지역민들의 독립정신이 돋보인다.

    그 처음이 곤양면 만세운동으로, 이는 서부경남 최초 만세를 고창한 역사로 기록된다. 만세운동의 열기는 그로부터 한 달여간 서포면, 사천읍, 삼천포 등지로 번졌다. 1919년 3월 13일. 곤양면 송전리 출신 김진곤 외 4명은 백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한쪽에 ‘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곤양헌병주재소에 던져 넣고 주민들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4월 6일과 19일 곤양 장날 곤양공립보통학교(현 곤양초) 학생들과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펼쳤다.

    ▲서포면·사천읍 만세운동= 당시 유학길에 올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원형은 경성(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그 길로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인 사천으로 내려와 해인사 지방학림의 학생이던 최범술에게 전달했다. 최범술은 독립선언서를 동학들과 함께 1만여 매를 인쇄해 서부경남 일대에 배포했으며, 송지환·신영범의 집에서 태극기 수백 매를 만들어 곤양면과 서포면 등지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최범술은 송지환 등과 곤양 장날인 3월 중순경 만세시위를, 4월 10일과 16일 서포개진학교 생도 및 주민 100여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펼쳤다. 또 천도교 사천군교구의 책임자였던 장태영(이금동 봉전마을)도 3·1운동에 참여해 천도교 총본부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감춰 사천으로 돌아온다.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 등은 즉시 선언서를 인쇄하는 한편, 연일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진주로 향해 그 주동자였던 강대창을 만나 사천에서도 거사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들은 임순백, 윤수상, 김성언 등과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의 졸업반 이윤조를 포섭한 뒤 거사일을 졸업식 날인 3월 21일로 정했다.

    거사 당일 학생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축구 시합을 했는데, 시합에서 이긴 이윤조가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친다. 학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몰려나가 읍면민들과 합세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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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읍 수양공원에 있는 ‘3·1의거 기적비’.

    ▲삼천포 등서 만세운동= 3월 25일 삼천포에서도 대대적 만세운동이 전개된다. 남양면에 사는 박종실은 진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강달영, 박진환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얻어 삼천포로 돌아온 이후, 삼천포공립보통학교 교사 황병두와 거사를 논의하게 된다. 여기에 김우열 등 지역 청년들도 동참한다.

    이들은 거사일을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졸업식 날이자 삼천포 장날인 3월 25일로 정하고 시위를 진행키로 한다. 제1대는 교사 황병두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노산공원에서, 제2대는 청년대를 주축으로 삼천포면 내 가까운 해변에서, 제3대는 면민들을 규합해 선구리 장터에서 거사키로 했다. 거사일, 간부학생이던 박상윤, 박종대 등을 선두로 학생들은 졸업식을 기다릴 새도 없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게 된다. 일경들은 학생들을 체포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면서 제2대 청년대가 장소를 해변에서 선구리 장터로 옮겼다.

    이들은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 제창과 독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펼쳤다. 아울러 사천에서는 4월 5일 곤명면 금성리와 14일 사천읍 중선리, 17일 곤명면 정곡리, 4월 중순경 사남면 우천리 등지로 대대적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사천 전역 깃든 독립정신= 독립운동을 주도한 많은 이들이 일제의 고문과 옥살이로 순국하거나 고초를 겪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은 사천 전역으로 퍼져 있다. 다솔사는 사찰 자체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사천읍 수양공원에는 1969년 건립된 ‘3·1의거 기적비’가 있으며, 곤양면사무소 앞으로 1995년 ‘의사 최원형 기적비’가 세워져 각각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또 서포초등학교 화단에는 1968년 세워진 ‘독립운동한 이들의 기념비’가 있다. 이 비의 비문은 최범술이 글을 짓고 오제봉이 쓴 것으로,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것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사남면 우천마을에는 2016년 주민들 주도로 ‘우천3·1만세운동 기념비’가 섰으며, 곤명면 금성마을에는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3월 1일을 목표로 ‘추모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사천에서 독립운동을 펼쳐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이는 39명이다. 그러나 미처 추서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는 105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된다. 장병석 사천문화원장은 “사천은 읍·면 단위로 주로 학생 청년들이 주축이 돼 활발히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는 당시 지역의 교육열이 우수했고, 조국 독립을 염원하는 지역민들의 정서가 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사천문화원에서 지역 항일운동과 독립투사들을 기록한 사천 항일운동사를 올해 발간하기 위해 조사와 감수 작업 중이다. 사천의 항일운동사와 독립운동가들을 기록해 명예회복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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