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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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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라디오 아저씨- 김현숙(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1-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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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방에 오는 아이들 대화 속에 요즘 자주 등장하는 분이 있다. 언짢다는 듯 ‘그 아저씨 진짜 재수 없어’ 하는 말투를 봐도 그렇고, 삐죽거리는 입모양을 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희들 사이에서 대우받는 인물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등굣길에 만난 아저씨 차림새를 세세하게 표현했고 그 아저씨가 흥얼대는 노래가 자기 학교 교가라는 둥 제법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처럼 전하곤 했다. 어떨 땐 ‘네가 듣지 못한 말을 나만 들었다’는 식으로, 아저씨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했다.

    아이들 말을 빌리자면 아저씨는 계절에 상관없이 늘 같은 바지를 입었으며 추우나 더우나 한쪽 바지통을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지낸다고 했다.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흉내 내면서 혼자 웃고 혼자 화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 그 아저씨가 항상 라디오를 들으며 다닌다는 것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부분은 아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다.

    얼마 전 학교 앞 문방구에 들렀다가 나도 그 아저씨를 봤다. 정말 왼쪽 귀에다 라디오를 댄 채였다. 동네놀이터를 향해 큰소리로 어떤 말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한 모습만 유지하며 견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를 떠받든 두 손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중대함을 대변하듯 정중했다. 하지만 비장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아저씨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높낮이만 존재할 뿐 이렇다 할 메시지가 없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실시간 그대로 내뱉다 보니, 중얼중얼 넘어가는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힘을 실어 내지르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가만 보니 제대로 알아들은 단어만 반복해서 말했고, 목소리가 커질 때 나오는 문장도 앞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주차위반, 경주법주, 다 컸잖아, 지켜요, 어버이 마음, 사연 보내주세요. 전화주세요. 사랑해요.’ 잠깐 내가 들은 말이다. 마치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것처럼 했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라디오를 받쳐 들고 목을 앞으로 쭉 뺀 채 아저씨가 외쳤다. 막 지나가던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 흘깃대며 욕을 퍼부어도, 어린 아이들의 조롱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도 아저씨는 연연해하지 않았다.

    “저래 보여도 저 아저씨 나쁜 말 하는 거 못 봤다니까.”

    문방구 아줌마가 쉬엄쉬엄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저씨에게 요구르트를 건넸다. 입가에 머금은 아줌마의 미소와 돌아서며 내게 건넨 그 말에, 아저씨 사정을 알아주는 씀씀이가 엿보였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아무데서나 아무 말이나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겪어본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라디오에서 나오는 대로, 들리는 대로 따라할지라도, 자기가 모르는 말은 넘길 줄 알며 욕 한마디 섞지 않고도 제 목소리 내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아저씨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당당하게 외쳤고 ‘사랑해요’를 거듭 외쳤다.

    잠시였지만 마음을 잡는 풍경이었다. 재잘대는 아이들과 삐걱대는 미끄럼틀, 놀이터를 뱅글뱅글 돌며 깔깔 웃는 꼬맹이…. 난 늘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그들의 말만 듣느라 이런 소리엔 무심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넘겨버린 소리들이 많았다. 어느 때는 일부러 회피했고, 어느 때는 그 존재조차 잊고 지냈다. 사람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웃어주세요’를 외치는 라디오 아저씨를 보면서 나는 내 모습을 다시 봤다.

    아이들을 향해 외치는 아저씨 말 가운데 빠지지 않고 꼭 되풀이되는 것이 있었다. ‘좋은 친구’ ‘안녕하세요’ 라디오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말 중에 마치 하고 싶은 얘기만 골라 한 것처럼 그랬다.

    김현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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