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 1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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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순간만 살다 죽을 것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며 살까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
삶을 죽음과 연결시켜 죽음 쪽에서 삶을 보면 삶이 더 또렷하고 충실해진다

  • 기사입력 : 2019-01-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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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말들만 모아본다. 상식인데 상식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있다가 없어진다. 빛도 사라진다. 지구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바다도 다른 것들이 흘러들어가 채워지며 썩다가 언젠가는 육지로 변할 것이다. 바다도 사라지는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듯이 호모사피엔스도 사라진다. 지금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유형의 동물이 언젠가는 멸종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도 죽는다. 길어야 100년 좌우로 살다 죽는다. 내 장례식에 와서 10분 이상 진심으로 슬퍼해 줄 사람은 절대 10명 이상이 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에 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예를 올리는 1-2분여만 지나면 둘러앉아 자신들의 잡다한 일상 얘기를 나누다 간다. 타자의 죽음은 절대 자신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마저도 자신의 경험이 아니다. 경험하면서 죽는 순간을 맞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잊힌다. 나도 잊힌다. 모든 관계도 잊힌다. 모든 것이 있다가 없어지듯이, 모든 관계에도 끝이 있다.

    아무리 부자라도 빈손으로 죽는다. 남겨놓고 가는 돈이 어찌 될지 그는 모른다. 어떤 권력자도 혼자 죽는다. 어떤 학자도 빈 머리로 죽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도 성형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결국 쭈글쭈글해지는 시간을 맞고, 흙색으로 변하다가 일그러지며 죽는다. 영생이라 해도 언젠가는 사라질 지구의 시간 안에서 영생일 뿐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 모든 명예는 한순간이다. 모든 권력도 한순간이다. 모든 부도 한순간이다. 순간? 순간도 되지 않는다. 순간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순간이다. 허무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허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다 허무하다.

    메인이미지
    송필용 作 ‘허무와 득도’.

    유튜브에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이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구라는 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지구도 겨자씨보다 작은데, 그 안에서 지나가는 시간이며, 공간이며, 생로병사며, 명예며, 치욕이며 하는 것들은 얼마나 또 사소한 것들인가. 전라도는 뭐고 경상도는 또 뭔가. 좌파는 뭐고 우파는 또 뭔가. 진보는 뭐고 보수는 또 뭔가. 백인은 뭐고 흑인은 또 뭔가. 철학자면 어떻고 뱃사공이면 또 어떤가. 철학자도 죽고 뱃사공도 죽는 마당에 득도는 뭐고 득도 못하는 것은 또 뭔가. 허무하고 허무한 존재들이 허무하고 허무한 짓들을 허무한 줄도 모르고 싸지르다가 속절없이 사라진다.

    순간만 살다 죽을 것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며 사는가. 다 사라질 것을 우리는 왜 잡는가. 결국 다 털고 갈 것을 왜 굳이 배우는가.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우리의 존재 조건이 허무함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허무와의 투쟁이 아닐까? 허무에 지지 않기 위해서. 허무에 지면 왜 안 되는가. 여기서부터는 질문이 불가능하다. 존재의 가장 궁극적 상태이기 때문에 질문도 거기서부터만 출발할 수 있다. 허무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허무를 관찰하고, 허무와 투쟁한다. 허무하고 투쟁하면서 나는 나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확인된다. 자신을 허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관찰하고 투쟁하도록 하는 토대가 허무인 것은 참 모순적이다. 삶을 죽음과 연결시켜 죽음 쪽에서 삶을 보면 삶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충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은 자신의 존재 형식인 허무와 스스로 전선을 형성하면서 허무이면서도 허무가 아닌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확인’을 스스로 경험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원을 함께 경험한다. 자기 존재의 자각,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장자』라는 책의 첫 페이지는 아주 미세한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천지라는 우주의 바다에서 몇 천리나 되는 크기로 자란 다음에 바다가 회오리바람을 따라 요동치며 솟구치자, 그 틈을 타서 하늘로 따라 올라 온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거대한 붕(鵬)이라는 새로 변환하여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는 매우 역동적인 얘기이다. 장자의 이런 역동적이고 낙관적인 삶의 자세는 어떤 통찰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까를 탐구하다 보면, 그 책 안에서 우리는 매우 비극적이고 허무한 한 문장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책받침 두께 정도의 얇은 틈새를 천리마가 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 홀연할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若白駒之過隙,忽然而已. ‘知北遊’) 삶이 순간이라는 인식으로 매우 극단적인 허무에 도달한 한 인격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토록 극단적인 허무에 도달한 사람이 또 무한 전변을 우주적 크기로 완수하는 역동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허무와 무한 확장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된다. 허무와 무한 확장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은 하나의 독특한 능력이 아니라 허무로 되어 있는 기반 위에서 사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존재적 명령이자 사명이다. 허무하기 때문이다.

    허무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 우주의 진실한 모습이다. 가치(value)가 아니라 사실(fact)이다. 어떤 의미인가는 아무 상관없다. 우주는 원래 허무하다. 허무하게 생긴 우주의 존재 형식을 노자나 장자는 “도”(道)라고 불렀다. 이런 도의 이치를 온전히 깨닫고, 그 이치를 자기화해서 구현할 능력까지 겸비하면, “득도”(得道)했다고 말해준다. 우주적 삶을 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단계에 오른 자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일을 잘 수행하는 활동성에 초점을 맞춰 말한다면, “도통”(道通)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 사명은 득도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득도한 자는 세상과 우주의 이치[理]에 밝아서 그때그때 상황을 잘 살펴, (즉 도통하여) 매우 적절한 행동[權]을 하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는다.” (‘秋水’) 이 적절한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우주적 차원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곤(鯤)으로 태어나 대붕(大鵬)처럼 살게 된다는 말이다.

    누군들 우주적 차원의 삶을 살기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득도의 지경이란 것이 매우 특별한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서 지레 포기하고 꿈도 꾸지 않기 십상이다. 그렇더라도 득도가 인간의 사명이라면, 이는 특별한 소수에게만 허락된 것일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야 하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주 질서에 맞는 적절한 행동 하나하나를 쌓는다면, 우주적 성취를 해내게 되는 단계까지 도달한다고 하니, 일상의 작은 행동도 도통의 길일 수 있다. 우리가 얻어야[得] 하는 도(道)는 어떻게 생겼을까? 전적들에 등장하는 도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움직임이나 모습이 감각적 수단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위무형”(無爲無形)!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허무를 나타내는 충실한 표현들은 없거나 없어진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없어지기 때문에 허무하고, 없거나 없을 정도로 사소하기 때문에 허무하다. “도”는 허무 그 자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전번에 여기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세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만져지는 것보다 세다고 해도 같은 말이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장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아서 가장 세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는 뜻이다.

    어떤 학생이 약간의 부정행위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치자. 이 학생은 점수와 정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매우 곤혹스런 기로에 서 있다. 점수는 정직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직은 점수보다 더 추상적이다. 이 곤혹스런 상황에서 득도의 길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높은 성적의 유혹을 이겨내고 정직을 선택하면 된다. 어떤 정치인은 당선과 진실한 봉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당선은 진실한 봉사보다 구체적이고, 진실한 봉사는 당선보다 추상적이다. 이때도 당선을 선택하면 도에서 멀어지고, 진실을 선택하면 도에 가까워진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을 쌓고 쌓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각성을 해서 자기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비록 작은 일이라도 메디치 가문 같은 역할을 한 번 시도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용기다.

    이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작은 승리이며,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경험시키는 작은 승리 안에서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고 허무와 득도가 한 몸이 된다. 작은 승리가 일어나는 잡다한 일상 안에서 우주가 펼쳐진다. <끝>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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