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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10,000일간의 기록- 최국진(한국폴리텍Ⅶ대학 창원캠퍼스 교수)

  • 기사입력 : 2019-01-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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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은 그저 수십억년 전부터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데, 극성스러운 인간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을 정하고 달력을 만들어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더니, 올해도 새해 첫해라고 지나친 관심을 가져주니 태양이 낯부끄러워 더욱 불그스름하게 얼굴을 드러낸 지가 벌써 23일이 지났다. 문득 십 년 전 1월 1일, 이십 년 전 1월 1일에 내가 어떤 새해 다짐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1999년 1월 1일에는 부산 해운대에 해돋이를 보러 갔으나 심술꾸러기 구름만 보면서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했고, 2009년 1월 1일에는 무학산에 오르다가 힘이 들어 중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만사형통을 빌고 공짜 떡국을 얻어먹었다. 필자의 지능지수가 평균보다 약간 높기는 하나, 이십 년 전의 일을 이처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의 능력은 아니니 이에 대한 비결이 궁금할 수도 있는데 그 답은 바로 일기장에 있다.

    1991년부터 하루하루 간단한 메모 형태로 시작한 일기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28년 동안 대략 10,000일간의 기록이 되겠다. 20대의 열정과 낭만, 행복과 번뇌 등이 잊혀진다는 아쉬움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밥과 물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듯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그 흔적들이 책장 한편에 시나브로 쌓여 가고 있다.

    언제든지 궁금한 날짜의 행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10,000일간의 기록을 남긴 가장 큰 장점이 되겠지만, 그 외에도 소소한 좋은 점들이 제법 있다. 그중의 하나는 내가 이까짓 일기 쓰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면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냐며 수시로 내 자신을 추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실의에 빠져 의욕을 잃고 며칠씩 일기를 쓰는 것조차 손을 놓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자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밀린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때로는 밀린 일기를 쓰기 전에 지난날의 일기장을 뒤적이다 보다 보면 정말 큰 위안이 되고 지금 처한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불쑥 솟아난다.

    또 다른 좋은 점은, 이번 칼럼처럼 다른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칼럼 요청을 받고, 직업의 특성상 논문과 보고서, 발표자료 등을 많이 작성해 봐서 부담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4차 산업혁명의 실체는?’ 이라는 제목으로 첫 칼럼을 쓰면서 일반인을 독자로 한다는 부담감에 제법 고생을 했었다. 이후에 ‘X세대 역할론’, ‘산수를 잘하자’ 등을 쓰면서 오랫동안 일기를 썼던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과 그것을 다시 말로 표현하는 것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 글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음을 이번 칼럼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부수적인 소소한 즐거움도 있다. 아내와 옛날 일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나의 승리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내게는 28년간의 완벽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물이 된다. 또한 매년 새로운 일기장을 사서 새로운 일 년의 기록을 준비하는 것도 작은 행복이었는데, IT시대에 발맞추다 보니 십 년 전부터 컴퓨터로 일기를 쓰면서 그 소확행은 사라져 버렸다. 대신 매년 말일에 일 년치 일기를 출력하여 책장 한편을 채우는 재미는 아직 남아있다. 컴퓨터 자판을 칠 수 있는 힘이 있는 순간까지는 계속 일기를 쓸 작정이니 70년 정도가 되면 기네스북에도 한번 신청을 해 보고 싶다.

    오늘 작심삼일의 패배감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서랍 어딘가에서 오랜 동면으로 잊혀 있던 일기장을 찾아내어 새로운 첫 페이지를 도전한다면 그 또한 필자에게는 일기를 쓰면서 갖는 작은 행복이 되겠다.

    최국진 (한국폴리텍Ⅶ대학 창원캠퍼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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