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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 임시정부(臨時政府) - 임시로 세운 정부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 기사입력 : 2019-03-1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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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기미년(己未年)으로 3·1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쟁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총칼로 잔학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 속에서도 조직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에서 우리 조상들의 용기 있는 독립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는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 한 달 뒤인 4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수정부를 수립하였다. 한 국가의 성립요건의 하나로 영토가 있어야 하나 영토를 일본에 빼앗긴 상황에서도 남의 나라 땅에서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에 앞서 1918년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1919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 선생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국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권유했다. 이것은 3·1독립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서울과 러시아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 국호는 ‘대한민국’, 통치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했고, 삼권분립체제를 확립했다. 일본에 망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영토를 계승한다고 했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뒤 상해에 겨우 한 번 와 보았을 뿐 별 관심이 없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구상하다가 1925년에 탄핵당했다. 그 뒤 대통령을 국무령(國務令)으로 바꾸어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맡았으나 내각 구성도 못하고 말았다.

    몇 사람의 임시정부 수반을 거쳐 김구(金九) 선생에 이르러서 비로소 수반의 역할을 옳게 하였다. 김구 선생은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일본에 무장 공격을 가했으니, 윤봉길 의사 등의 거사 성공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한 포위망을 좁혀오자, 임시정부를 가흥(嘉興), 장사(長沙) 등지를 거쳐 중국 서남부에 있는 중경(重慶)으로 옮겼다. 1945년 해방 뒤 11월 3일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국내 각 정당의 이해관계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돌아왔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김구가 살해되어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호나 국가 정치체제, 삼권분립제도 등은 그대로 채택되어 임시정부의 영향이 어느 정도 미치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 암울한 시대에 남의 나라 땅에서지만 뜻있는 애국선열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臨 : 다다를 림. *時 : 때 시.

    *政 : 정사 정. *府 : 관청 부.

    동방한학연구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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