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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젠더에 관한 새로운 시선 하나- 백승진(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19-04-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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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메인주에 있는 어떤 마을에 어려서부터 여자처럼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걷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아이의 여자 걸음걸이 정도가 더욱 뚜렷해지자 동네 남자 아이들이 그 애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그 애를 불러 세워 싸움이 시작되고 그 아이들은 여자처럼 걷는 아이를 다리 아래로 던져 죽게 만들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마치고 버틀러는 “왜 걷는 모습 때문에 누군가가 살해돼야 하는가?” 그리고 “왜 한 아이의 걷는 모습이 다른 남자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그렇게 걷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버틀러는 ‘규범으로서의 젠더’가 강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성애 사회에서는 ‘이성애 규범성’이 작동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 남자와 여자로 분류된 섹스·젠더 규범 틀 안에서 남성은 반드시 남자가 되어서 남성성을 따라야 하고, 여성은 반드시 여자가 되어서 여성성을 따라야 한다. 젠더 규범은 말할 때, 걸을 때, 행동할 때 등등 남자이기 때문에 준수해야 할 남성성의 실천 항목과 여자이기 때문에 준수해야 할 여성성의 실천 항목으로 이분화되어 있고 이러한 성 역할인 젠더를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는다. 버틀러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은 여자들의 걷는 모습으로 남자가 여자처럼 걸으면서 젠더를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남자 아이는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처벌을 받은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이분화된 생물학적 성(섹스) 중에 하나를 부여받는다(물론 태어난 아이의 의사는 전혀 반영될 수 없다). ‘장군’이나 ‘공주’라는 호칭에 근거해 남자 아이는 남성성을, 여자 아이는 여성성을 평생 보여주어야 한다. 남성성을 표현하는 용어와 여성성을 표현하는 용어가 차별화되어 있다. 여기서 남·여 이분법에 따른 젠더 표현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특성으로 인간 몸에 자연스럽게 각인되어 변할 수 없는 인간의 필요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강제적 이성애 사회에서 젠더가 인간의 본질 개념으로 작동되고 있는데 대해서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강제적 이성애의 전복을 염두에 둔 젠더의 ‘비본질성’과 ‘비자연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분화된 젠더인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간의 내부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특성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시스템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강요에 의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단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의 ‘수행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젠더란 강요에 의한 몸의 “양식화된 행동의 반복”의 결과라는 것이다. 젠더는 정치적 배경이 있는 문화적 형성체인 것이다. 젠더의 수행적 개념을 따르면 섹스화된 몸과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젠더의 연결 고리는 끊어지게 되고 젠더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도구”가 된다. 이 말은 “어떤 종류의 젠더 표현도 어떤 성정체성에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내용을 좀 더 확대해보면 “여자가 된 사람이 반드시 여성일 필요가 없고, 남자가 된 사람이 반드시 남성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몸과 성 역할의 관계에 필연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성애 사회와 남성중심 사회에서 드러나는 여성문제와 성소수자 문제를 버틀러가 강조한 젠더의 개념이 사라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백승진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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