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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⑦ 들불처럼 만세운동 일어난 김해

1919년 3월 30일 밤 9시 김해 읍내장터 뜨거운 ‘독립 함성’
배동석·구명순·배덕수 등 주도
김해지역 첫 만세운동 벌여

  • 기사입력 : 2019-04-0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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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 3월 30일, 김해읍내 장터의 공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장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꾼들의 소란스러움 사이사이 은밀하고 민첩한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저무는 밤 9시 무렵,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떠난 빈 장터는 삼삼오오 몰려든 김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이었을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소리쳤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각자의 품속에서 꺼낸 태극기들이 힘차게 흔들렸다. 김해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30일 만이었다. 앞선 3월 13일 김해읍내 만세시위를 준비했지만 경찰에 의해 중단되고 18일 후에야 뜻을 이룬 것이다.

    그 중심에는 서울에서 독립운동서를 가지고 온 의전생(의대생) 배동석과 서울의 만세운동을 보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귀향한 여고생 구명순, 읍내 주변 10여개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 참여를 독려한 배덕수가 있었다. 일본 헌병은 강력한 진압과 함께 배동석과 배덕수, 임학찬, 박덕수 등의 주동자들을 검거하고 시위대를 진압했다. 그렇지만 이날 지펴진 김해 독립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이후 진영과 장유 등 김해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됐다.


    ▲김해 독립운동 발화지의 100년 후

    8일 김해 독립운동의 최초 발화지인 동상시장을 찾았다. 100년 전 함성이 울려퍼졌던 거리는 이제 ‘경남의 이태원’이라 불리는 외국인의 거리로 변해 있었다. 낯선 북적임이 가득한 이 거리에서 독립운동을 기념할 만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동상시장과 독립운동의 연관성을 소개하거나 발원지를 알리는 안내판도 없었고, 김해 독립운동의 최초 주도자인 배동석 지사의 생가터(동상동 981)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상인들에게 물어 생가터에 세워진 안내판을 찾았지만 그 규모와 형태는 처참했다. 안내판은 전신주 기둥에 가로 35㎝, 세로 50㎝ 크기로 부착돼 있었는데, 안내판 윗부분이 파손돼 있었고, 부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노란색 박스테이프로 고정돼 있었다. 박스 테이프는 배 지사의 행적을 소개하는 글까지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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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독립운동의 발화지인 동상시장.

    김해 동상동 출신인 배동석(1891∼1924) 지사는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으로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에는 학생 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배 지사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해 동상동 시장에서의 첫 만세운동 이후 일본군에게 체포됐으며, 1920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배 지사는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4년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1980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김해 읍내에서는 3월 31일 첫 시위 이후 4월 2일 오후 4시께 읍내 장터에서 또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읍내 장은 폐쇄됐다.



    ▲연지공원 내 독립기념관과 소녀상

    발길을 옮겨 김해 연지공원으로 향했다. 김해시에서 만든 ‘거리의 독립기념관’을 보기 위해서다. 지난 2017년 12월 31일 만들어진 기념관은 공원 한편 주차장 옆에 자리하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꽤 넓은 규모로 깔끔하게 조성돼 있다.

    기념관 양측에 세워진 조형물에는 배동석 지사를 비롯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로 등재된 의인 5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기념관 가운데는 유림 파리장서비가 우뚝 서 있으며, 그 뒤로 길게 이어진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와 다양한 독립운동사가 사진과 함께 기술돼 있다. 그러나 공원을 안내하는 표지가 별도로 없고, 이날 공원을 오가는 시민들도 이 공간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답해 아쉬웠다. 김해시는 인근 삼계체육공원의 기미독립의거기적비와 화정공원의 의사배치문기적비를 옮겨와 이 일대를 3·1독립운동 기념 테마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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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연지공원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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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삼계체육공원에 있는 기미독립의거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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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화정공원에 있는 의사 배치문 기적비.

    연지공원에는 독립운동과 연관된 특별한 공간이 한 곳 더 있다. 조각공원 내에 세워진 ‘김해 평화의 소녀상’ 조형물이다. 이날 봄꽃 나들이를 나와 소녀상 옆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 소녀상은 김해지역 106개 시민사회단체와 김해평화나비회원 등 2000여명의 시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들었다. 소녀상 앞 표지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비는 소녀의 희망이다. 소녀 앞에 서 있는 큰 돌 조형은 어린 소녀가 겪은 고통과 애환, 불행했던 현실 등을 의미한다. 그 조형의 잘려져 나간 돌 위에 맨발로 서 있는 소녀의 손등에는 한 마리 나비가 꿈을 향해 날갯짓하고 있다. 나비는 훨훨 날아가 소녀의 희망을 새긴다. 꿈과 희망의 상징인 나비를 새김으로써 이 소녀에게도 누구나 꾸는 꿈이 있었음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3·30 김해 첫 만세시위 이후 만세운동

    김해읍내에서의 첫 만세운동 다음 날인 31일에는 진영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당시 진영시장에 수많은 장꾼들이 운집한 가운데 오후 1시 무렵 김우현과 김정태, 김성도, 김용환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 수십 장과 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배부했고, 당시 많은 장꾼들도 운동에 참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헌병들이 주동인물을 검거하면서 시위가 크게 확대되지 못하고 끝났다. 이날 만세운동 규모에 대해 당시 김해헌병분견소장의 시말서에는 당시 집회 인원이 약 2000명으로 표기돼 있지만, 일본 헌병의 보고에는 참가자 수가 200여명으로 돼 있다. 이날 진영의 만세운동은 이후 4월 3일 2차 의거, 4월 5일 3차 의거로 이어졌다.

    4월 중순부터는 장유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활발했다. 1919년 4월 12일 대청천 일대에서 지역 유지인 김승태와 유하리 출신 김종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해 최대 규모인 3000여명의 군중이 무계시장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손명조, 김용이, 김선오가 일본 헌병의 총을 뺏으려다 순국했으며, 가족들과 주민들은 이들의 시신을 업고 일본 헌병 주재소를 찾아가 부수기도 했다.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8일자에 장유 만세운동을 ‘김해의 폭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장유지역 만세의거는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 여사가 직접 작성한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김해시는 운동가를 기증받은 후 분실했다.

    김해 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김해시는 그동안 독립운동사 연구나 기념사업에서 불모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 걸음마 단계로 다각도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특히 이번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애국지사 발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널리 알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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